이 블로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합니다. 이 글은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됐으며, 개혁주의적 견해는 글 하단 ‘개혁주의의 견해’ 섹션에 별도 표기합니다.
한 글자가 세계를 갈랐다
예수는 정확히 누구인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인가?
A2편 마지막에 던진 이 질문은 역사적 호기심이 아니다. 4세기 로마 제국 전체를 뒤흔든 실제 전쟁터였다. 거리에서 빵을 사면서도 사람들이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인가, 유사본질인가”를 놓고 논쟁했다고 당대의 목격자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전한다. 신학이 학자의 서재에만 머물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밖의 박해가 끝나자, 안의 질문이 폭발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교회는 전례 없는 방법을 택했다 — 제국 전역의 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결정하는 것. 이것이 공의회(Ecumenical Council)다.
니케아에서 칼케돈까지, 약 130년간 네 번의 공의회가 열렸다. 이 네 번의 회의가 기독교 2,000년 역사의 교리적 뼈대를 세웠다.
논쟁의 무대 — 지중해 동부의 신학 거점들
공의회가 열린 도시들은 모두 지중해 동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 동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이집트)는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70인역)이 탄생한 학문의 도시로, 로고스(말씀) 신학의 본거지였다. 안디옥(시리아)은 바울의 선교 거점이자 성경의 문자적·역사적 해석을 강조하는 학파의 중심이었다. 로마는 서방 교회의 수장이 있는 곳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날 이스탄불)는 콘스탄티누스가 새로 세운 제국의 수도였다.
이 도시들 사이의 신학적 긴장 — 특히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대립 — 이 네 번의 공의회를 관통하는 배경이다.
니케아 공의회(325년) — “동일본질”인가, “유사본질”인가
아리우스의 주장
논쟁의 불씨를 당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였다. 그의 주장은 명료했다. “아들(예수)은 아버지(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다.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다.” 아리우스는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성을 지키는 길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인데, 아들도 하나님이라면 두 하나님이 되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이 주장은 대중에게 쉽게 먹혔다. 아리우스는 자기 교리를 노래 가사로 만들어 퍼뜨렸고, 항구의 노동자들까지 그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아타나시우스의 반박
아리우스에 맞선 인물은 같은 알렉산드리아의 부제(나중에 주교가 되는) 아타나시우스였다. 당시 겨우 20대였던 이 청년은 핵심을 꿰뚫었다. “만약 예수가 피조물이라면, 피조물이 피조물을 구원한 셈이다. 그러나 피조물은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
이것은 추상적 사변이 아니라 구원의 문제였다.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구원 자체가 무너진다.
니케아 공의회 아이콘 (16세기, 미카엘 다마스키노스 작).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주교들이 모여 아리우스의 이단을 정죄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사진: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325년, 니케아에 모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논쟁이 제국의 통합을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제국 전역의 주교들을 소아시아의 도시 니케아로 소집했다. 약 318명의 주교가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 역사상 최초의 세계 공의회였다.
치열한 토론 끝에 공의회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했다. 결정적인 단어는 그리스어 한 단어였다 —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 동일본질). 아들은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호모이우시오스)“이 아니라 “같은 본질”이라는 선언이었다. 그리스어 철자로는 이오타(ι) 하나의 차이. 그 한 글자에 구원의 의미가 걸려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요한복음 1: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 —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니케아에서 결론이 났지만,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리우스파는 여러 황제의 후원을 받으며 반격했고, 아타나시우스는 다섯 번이나 추방당했다. “아타나시우스 대 세계(Athanasius contra mundum)“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논쟁은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아들이 하나님이라면, 성령은 어떠한가? 마게도니우스 등 일부 신학자들은 성령의 신성을 부정했다. 이들을 ‘프뉴마토마키(성령 반대자)‘라 불렀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제2차 공의회는 니케아 신경을 확장하여 성령에 대한 고백을 추가했다.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우리는 믿습니다. 성령은 아버지에게서(서방 전통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로써 삼위일체 교리 — 한 하나님 안에 아버지, 아들, 성령 세 위격이 계시다는 고백 — 가 완성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예배에서 고백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고린도후서 13:13
에페소스 공의회(431년) —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어떻게 만나는가
삼위일체 논쟁이 일단락되자, 다음 질문이 떠올랐다. 예수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라면, 그 둘은 예수 안에서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네스토리우스(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는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그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닌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리아가 낳은 것은 인간 예수이지, 하나님을 낳을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이 강하게 반박했다. 키릴의 논점은 이렇다 — 신성과 인성을 그렇게 분리하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인간 예수”일 뿐이고 “하나님 아들”은 죽지 않은 셈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다시 불확실해진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감당하지 않았다면, 구원이 완성된 것인가?
431년 에페소스에서 열린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마리아에 대한 “테오토코스” 호칭을 승인했다. 이것은 마리아 숭배의 근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될 수 없다는 기독론적 선언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한복음 1:14
칼케돈 공의회(451년) — 두 본성, 한 인격
에페소스 이후에도 진자는 반대쪽으로 흔들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도사 에우티케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하나의 본성만 남았다고 주장했다. 마치 물방울이 바다에 떨어지면 사라지듯, 인성이 신성 속에 녹아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단성론(Monophysitism)‘이라 부른다.
이 주장에 대해 로마의 주교 레오 1세는 유명한 레오의 교서(Tomus Leonis)를 보냈다. 핵심 문장은 이렇다 — “각 본성은 다른 본성과의 연합 안에서 자기 고유한 것을 발휘한다.”
45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맞은편의 도시 칼케돈에 약 520명의 주교가 모였다. 이 공의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정밀한 교리 정의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 칼케돈 정의(Definition of Chalcedon).
핵심 내용은 네 개의 부정어로 요약된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두 본성은:
- 혼합 없이(ἀσυγχύτως) — 신성과 인성이 뒤섞이지 않는다
- 변화 없이(ἀτρέπτως) — 어느 쪽도 다른 쪽으로 변하지 않는다
- 분리 없이(ἀδιαιρέτως) — 둘로 찢어지지 않는다
- 분할 없이(ἀχωρίστως) — 각각 따로 떼어낼 수 없다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이 온전히 보존된다. 이 정의는 아리우스(신성 부정), 네스토리우스(신성·인성 분리), 에우티케스(인성 흡수)를 모두 배제하는 정밀한 균형이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립보서 2:6-8
오해와 진실
“공의회는 정치적 타협이었을 뿐 아닌가?”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했고, 정치적 역학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의회의 결론이 단순한 정치적 타협이었다면, 1,700년간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 개신교 모두에게 권위를 인정받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니케아 신경은 오늘도 전 세계 수십억 기독교인이 고백하는 신앙의 기초다.
“이런 미세한 교리 차이가 정말 중요한가?”
호모우시오스와 호모이우시오스의 차이가 글자 하나라고 가볍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글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다 — 십자가에서 죽은 이가 하나님 자신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보낸 피조물인가? 전자라면 구원은 확실하다. 후자라면 불확실하다. 교리는 추상이 아니라 구원의 근거다.
“칼케돈 정의를 모든 기독교인이 받아들이는가?”
아니다. 칼케돈 이후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교회들이 갈라져 나갔다. 오늘날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이들을 ‘오리엔탈 정교회(Oriental Orthodox)‘라 부른다. 이들은 단성론을 주장한다기보다, 키릴의 “하나의 본성” 표현을 칼케돈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즈니크(고대 니케아)의 하기아 소피아.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이 도시에서 열렸다. 현재 터키 이즈니크에 유적이 남아 있다. 사진: Dosseman,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현재는 어디에 있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동방 정교회의 성찬 예배(신성 전례), 로마 가톨릭의 미사, 성공회와 루터교의 예배에서 이 신경이 낭독된다. 개혁주의 교회 역시 이 신경을 교회의 보편적 신앙고백으로 존중한다.
칼케돈 정의는 기독교 신학의 문법이 되었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 — 이 공식이 없었다면, 이후의 모든 기독교 신학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4세기와 5세기의 교부들이 치열하게 싸운 것은 권력이 아니었다. 적어도 최선의 순간에, 그들은 이 질문을 붙잡고 있었다 — 우리가 예배하는 분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답이 2,000년 기독교의 교리적 뼈대가 되었다.
네 번의 공의회는 교리를 확정했지만, 교회의 일치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칼케돈을 받아들이지 않은 동방 교회는 이미 갈라져 나갔고, 동방과 서방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균열이 쌓이고 있었다. 로마의 주교는 점점 더 강한 권위를 주장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균열이 수백 년 뒤 돌이킬 수 없는 분열로 터진다.
개혁주의의 견해
초대 공의회에 대한 존중. 개혁주의 신학은 니케아에서 칼케돈까지의 네 공의회를 교회의 정당한 유산으로 받아들인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이 공의회들의 결정을 지지하며,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관한 정통 교리를 옹호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 제2장과 제8장은 니케아와 칼케돈의 언어를 그대로 반영한다. “한 하나님 안에 세 위격”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중보자” — 이것은 공의회의 유산이다.
교리의 필요성. “교리 없이 성경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개혁주의는 교리가 성경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정확히 요약하고 이단을 분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본다. 아리우스도 성경을 인용했다. 문제는 성경을 읽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였다. 신경과 신앙고백은 교회가 2,000년간 성경을 어떻게 읽어왔는지의 기록이다.
공의회의 권위와 한계. 그러나 개혁주의는 공의회의 결정이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고 보지 않는다.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모든 결정은 성경에 비추어 검증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1장 3항은 이렇게 고백한다 — “교회 회의 이래 모든 법령과 결정은 … 하나님의 말씀에 합치하는지에 따라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이 최종 권위이고, 공의회는 그 성경을 충실히 해석한 한에서 권위를 갖는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디모데후서 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