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주일 아침, 우리는 습관처럼 말한다. “성전에 갑니다.” 교회 건축헌금 봉투에는 “성전 건축 기금”이라 적혀 있고, 목회자는 “이 거룩한 성전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고 인사한다. 이 표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묻고 싶다. 이 건물이 정말 성전인가?
구약 성전 — 그림자가 가리킨 것
구약의 성전은 단순한 예배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 하늘과 땅이 맞닿는 접촉점이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던 날,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으로 가득 찼다.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 열왕기상 8:11
그러나 솔로몬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 건물이 하나님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 열왕기상 8:27
성전의 거룩함은 돌과 금에 있지 않았다. 그 안에 거하시는 분 때문이었다. 성전은 본체가 아니라 그림자였고, 손가락이지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 손가락은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스도 — 성전의 본체가 오시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으신 후, 유대인들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 요한복음 2:19
유대인들은 46년 걸려 지은 건물을 떠올렸다. 그러나 요한은 주석을 단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요한복음 2:21
이것이 결정적 전환점이다. 구약 성전이 가리키던 모든 것 — 하나님의 임재, 속죄, 중보 — 이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 마태복음 27:51
이것은 사고가 아니라 선언이었다. 돌로 만든 성전의 시대는 끝났다.
사마리아 여인이 “어디서 예배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 요한복음 4:21, 23
장소의 시대는 끝났다. 예루살렘도, 그리심 산도, 그 어떤 건물도 아니다.
오순절 — 임재가 이사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오순절에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강림하셨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때 지성소의 구름 속에 머물던 하나님의 임재가, 이제 사람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경이로운 어조로 선언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고린도전서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고린도전서 6:19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나오스(ναός)‘는 성전의 바깥뜰이 아니라 지성소 — 하나님이 실제로 거하시는 가장 거룩한 내부 공간을 가리키는 단어다. 바울은 이 가장 거룩한 단어를 신자들의 몸과 공동체에 적용한다. 이것은 수사적 과장이 아니다. 성령의 내주라는 신학적 사실의 정밀한 표현이다.
그리고 공동체 전체가 함께 성전이 되어 간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 에베소서 2:21
베드로도 같은 진리를 증언한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베드로전서 2:5
성전은 이제 돌이 아니라 산 돌들로 지어진다. 벽돌이 아니라 사람이다.
건물을 “성전”이라 부를 때 일어나는 일
한국 개신교 초기, 선교사들은 교회 건물을 “예배당(禮拜堂)“이라 불렀다. 그러나 1970~8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성전”이라는 표현이 급속히 자리 잡았다. 건물이 신앙 공동체의 성취와 위상을 상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용어 변화는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다. 세 가지 심각한 왜곡을 낳는다.
첫째, 거룩한 공간의 신화가 생긴다. “성전에 나온다”는 표현은 무의식 중에 예배를 장소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그 건물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감각이 자리 잡으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은 ‘세속’이 된다.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라는 신약의 선언이 퇴색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로마서 12:1
둘째, 건축이 신앙의 척도가 된다. “성전을 짓는 일에 참여하라”는 말에는 거절하기 어려운 신학적 압박이 내포되어 있다. 건물의 규모가 교회의 성공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고, 더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짓는 것이 최고의 헌신처럼 여겨진다.
셋째, 만인제사장직이 약화된다. 성전이 있는 곳에는 제사장이 필요하다. 건물을 성전이라 부르는 순간, 목회자는 자연스럽게 제사장의 자리에 올라가고, 종교개혁이 피로써 회복한 만인제사장직은 다시 흐려진다.
예배당이라는 이름을 되찾을 때
오해하지 말자. 교회 건물을 경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말씀을 듣고, 성례를 집행하고, 공적 예배를 드리는 공간은 소중하다. 그러나 그 소중함은 건물 자체의 거룩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모이는 산 돌들 —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의 공동체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교회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 교회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되며, 그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택함받은 성도의 회중이다(25장). 교회의 참된 표지는 화려한 건축물이 아니라, 말씀의 순전한 선포와 성례의 올바른 집행이다.
건물은 “예배당”이다. 성도들이 모이는 집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천상의 예루살렘에는 놀랍게도 성전이 없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 요한계시록 21:22
하나님과 어린 양이 직접 성전이시다. 건물 성전은 필요 없다. 이것이 모든 것의 종착점이다.
“예배당”이라는 말을 되찾는 것은 사소한 용어 교정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것을 고백하는 행위다. 참된 성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 안에서 모인 우리가 성전이다. 이 진리를 회복할 때, 건물 중심의 신앙은 무너지고, 복음 중심의 공동체가 세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