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기독교는 여성을 침묵시키는 종교이고, 성경은 가부장제의 성전(聖典)이며, 교회는 마녀재판으로 여성을 불태운 기관이라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기독교가 여성을 “타자”로 만들었다고 진단했고, 메리 데일리는 가부장적 신 자체가 억압의 구조라고 선언했다.
이 비판은 무시할 수 없다. 교회가 역사 속에서 여성을 억압한 일이 있었는가? 있었다. 중세 교회는 여성을 교육에서 배제했고, 마녀재판은 여성에게 불균형적으로 가혹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교회의 실패가 곧 복음의 결함인가?
기독교 이전, 여성은 어떤 존재였는가
고대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결핍된 남성”으로 정의했다. 로마법 아래 여성의 법적 지위는 가부장(pater familias)의 재산에 가까웠다. 유대 사회에서 랍비들은 “여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음란을 가르치는 것”이라 했고, 법정에서 여성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없었다.
이것이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 세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첫 페이지에서 전혀 다른 선언을 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7
남자와 여자 모두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 선언은 고대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존엄이 성별에 의해 삭감되지 않는다는 사상은 기독교 신학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라는 혁명
예수는 당시 어떤 랍비도 하지 않은 일을 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여성에게 말을 걸었고, 가르쳤으며, 존엄을 돌려주었다.
사마리아 여인 — 정오의 우물가에서, 사회적으로 배척받던 한 여인에게 예수는 가장 깊은 진리를 직접 계시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한복음 4:13-14
제자들은 “어찌하여 여자와 말씀하시나이까” 하고 놀랐다. 그 여인은 마을로 달려가 첫 번째 전도자가 되었다.
혈루증 여인 — 십이 년 동안 부정한 자로 낙인찍혀 아무도 손대지 않던 그 여인에게, 예수는 공개적으로 존엄을 선포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 마가복음 5:34
간음한 여인 — 남자들은 돌을 들었고, 율법은 죽음을 명했다. 예수는 말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8:11
여성을 억압하는 자가 이런 말을 하는가?
그리고 부활 —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의 첫 증인으로 예수는 여성들을 세웠다.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 마태복음 28:5-6
만약 부활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라면, 증언이 법적으로 무효인 여성을 증인으로 내세울 이유가 없다. 세상이 여성의 목소리를 무시하던 그 시대에,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소식을 여성의 입에 맡기셨다.
”잠잠하라”는 무슨 뜻인가
이제 가장 논쟁적인 구절로 가보자.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 고린도전서 14:34-35
이 구절만 떼어내면 명백한 여성 억압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한 구절로 읽는 것이 아니라 전체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한다. 같은 바울이 같은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 고린도전서 11:5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14장의 “잠잠하라”가 여성의 모든 공적 발언을 금지하는 것이라면, 11장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주제는 예배의 질서다. 33절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로 시작한다. “잠잠하라”는 무질서한 방해 발언에 대한 목회적 지침이지, 여성의 입을 영구히 봉하라는 보편적 명령이 아니다.
디모데전서도 마찬가지다.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 디모데전서 2:11-12
여기서 “주관하는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텐테인(αὐθεντεῖν)은 신약 전체에서 단 한 번 등장하는 특수한 단어로, 정당한 교육이 아니라 강압적으로 권위를 빼앗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바울의 실제 사역을 보라 — 그는 뵈뵈를 교회의 일꾼(디아코노스)으로, 브리스길라를 동역자로, 유니아를 사도들 가운데 존중히 여겨지는 자로 소개한다. 여성을 침묵시키려는 사람이 여성 동역자들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칭찬하겠는가?
교회의 실패와 복음의 본질
여기서 정직해야 한다. 마녀재판은 실제로 일어났다. 교회가 문화적 가부장제를 복음의 이름으로 정당화한 역사가 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지적 사기다.
그러나 교회의 실패와 복음의 본질을 구별해야 한다. 마녀재판은 중세 후기와 초기 근대의 공포, 미신, 국가 권력과 교회 권력이 뒤엉킨 비극이었다. 그것은 산상수훈이 가르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의 원리가 철저히 적용되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반대로 복음이 실제로 한 일을 보라. 초대교회는 과부를 체계적으로 돌보는 최초의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었다. 중세 수녀원은 여성이 교육받고 지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근대 여성 참정권 운동의 지도자 상당수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확신에서 출발한 기독교인이었다.
가장 급진적인 선언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페미니즘이 사용하는 “인간 존엄”과 “평등”이라는 언어 자체가 기독교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이 동등한 존엄을 지닌다는 사상은 하나님의 형상 개념 없이는 철학적으로 정초되기 어렵다. 니체는 이것을 꿰뚫어 보았다. 신을 죽이면 기독교적 평등 도덕도 함께 폐기해야 한다고.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이 남편에게 명령한 것은 군림이 아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 에베소서 5:25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한 것은 무엇인가? 죽는 것이다. 남편에게 요구된 것은 지배가 아니라 자기 희생이다. 이것이 억압의 논리인가?
그리고 바울은 결정적인 선언을 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갈라디아서 3:28
인종, 계급, 성별의 장벽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진다. 2천 년 전 이 선언은 고대 세계의 모든 위계질서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도전이었다. 복음은 여성을 억압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존엄을 가장 먼저 선포한 힘이었다.
당신이 거부하는 것이 정말 기독교인지, 아니면 교회의 실패와 문화적 편견이 뒤섞인 왜곡된 그림자인지 — 한 번쯤 구별해 볼 가치가 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직접 말을 건네시고, 피를 흘리던 여인을 “딸아”라고 부르시며,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여인 앞에 서신 그분의 실제 모습을 만나 보시기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