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 나보다 착한데, 왜 구원받지 못한다는 건가요

스님이 나보다 착한데, 왜 구원받지 못한다는 건가요

#비교종교#불교#구원론#일반은혜

어느 날 한 청년이 물었다. “절에 가면 새벽부터 일어나 기도하고, 검소하게 살며, 남을 돕는 스님들이 계세요. 솔직히 교회 다니는 저보다 훨씬 착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요? 그게 공정한 건가요?”

이 질문은 무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직한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 안에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가정이 숨어 있다.

구원은 착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바로 이 가정을 해부해야 한다.


착함이라는 저울의 눈금은 누가 정하는가

우리는 일상에서 ‘착하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남에게 친절한 사람,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 자기 것을 나누는 사람. 이런 기준으로 보면 수행자의 삶은 분명 존경스럽다. 그 헌신과 절제는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착함’의 기준을 완전히 다른 곳에 놓는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레위기 19:2

기준은 이웃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이다. 인간의 도덕적 관찰로 측정한 ‘착함’이 아니라, 창조주의 성품에 비추어 본 완전함이 저울의 눈금이다. 이 저울 위에 서면, 누구도 “나는 충분히 착하다”고 말할 수 없다.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로마서 3:10-12

이것은 비관주의가 아니다. 눈금이 바뀐 것이다. 옆 사람과 비교하면 나은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coram Deo) 서면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


왕궁의 정원사

한 가지 비유를 생각해 보자. 어떤 정원사가 왕궁의 앞마당을 아름답게 가꾼다. 잔디는 언제나 푸르고, 꽃은 계절마다 만발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감탄하고, 왕궁의 품격은 올라간다. 그런데 이 정원사는 왕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왕에게 관심도 없다. 왕이 부르면 “저는 정원이나 가꿀게요”라고 돌아선다.

정원은 아름다운가? 그렇다. 정원사의 기술은 탁월한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왕과의 관계인가? 결코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참된 미덕(true virtue)‘의 문제로 보았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선행은, 아무리 외면적으로 아름다워도, 궁극적인 의미에서 ‘미덕’이라 부를 수 없다. 이는 그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 행위가 향해야 할 최종 목적지 — 창조주 — 를 비워 둔 채 아름다운 형식만 남았다는 뜻이다.


일반은혜 — 놀라운 것, 그러나 구원이 아닌 것

그렇다면 불교 수행자의 선행은 의미 없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개혁주의 신학은 ‘일반은혜(common grace)‘라는 개념으로 이 현실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양심, 이성, 도덕적 감각을 주셨다. 비가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함께 내리듯, 선을 향한 감각도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창조의 선물이다.

수행자의 자비, 검소, 헌신 — 이것은 창조 질서의 잔향이며, 일반은혜의 열매다. 이 열매는 사회를 유지하고, 문화를 고양하며, 인간 공동체를 보존한다.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이렇게 말했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gratia naturam non tollit sed restaurat).” 일반은혜 아래서 피어나는 도덕적 아름다움은 진짜이며, 우리는 이것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시민적 의(civic righteousness)와 하나님 앞에서의 의(righteousness coram Deo)는 차원이 다르다. 전자는 사회를 위해 충분하지만, 후자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성립한다. 일반은혜는 세상을 유지하는 은혜이지, 죄인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구원적 은혜가 아니다.


자력의 함정 — 가장 정교한 형태의 교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불교의 수행 체계는 본질적으로 자력(自力)의 길이다. 팔정도, 사성제, 참선 — 이 모든 것은 자기 안의 무명(無明)을 깨뜨리기 위한 노력이다. 이 노력 자체는 진지하고 처절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죄로 물든 의지가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가?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죄를 죽이는 것(mortification of sin)은 성령의 사역이지, 인간의 자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자력으로 죄를 다스리려는 시도는, 그것이 아무리 치열해도, 오히려 “내가 해냈다”는 교만의 가장 정교한 형태가 될 위험이 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로마서 9:16

구원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긍휼의 선물이다. 이것은 게으름의 변명이 아니다. 가장 급진적인 겸손의 선언이다.


존재의 방향 — 해체인가, 회복인가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도덕의 양에 있지 않다. 존재의 방향에 있다.

불교는 자아를 해체한다. 무아(anattā)의 가르침은 ‘나’라는 것이 본래 환상이며, 이 환상을 깨뜨릴 때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말한다. 목적지는 열반(nirvāṇa) —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집착의 소멸이라고 설명하지만, 어쨌든 자아는 허물어져야 할 대상이다.

기독교는 자아를 회복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으나 타락으로 일그러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형상이 회복된다. ‘나’는 없어져야 할 환상이 아니라, 회복되어야 할 걸작이다. 새 창조(new creation) 안에서 ‘나’는 가장 온전한 ‘나’가 된다.

이것이 두 전통의 가장 깊은 분기점이다. 같은 ‘내려놓음’을 말하면서, 한쪽은 자아의 해체를, 다른 쪽은 자아의 귀환을 향한다.


우리가 더 착해서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고백을 해야 한다.

기독교인이 “스님보다 더 착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사실 교회 안의 위선과 실패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바울은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라 불렀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디모데전서 1:15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마가복음 2:17

복음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구원은 착한 사람의 상이 아니라, 자기가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진 의사의 방문이다. “나는 괜찮다”고 느끼는 것이 오히려 가장 위험한 상태일 수 있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8-9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흥미로운 것은, 이 ‘은혜의 복음’이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 더 급진적인 윤리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로마서 12:1

착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삶과, 이미 사랑받았기에 감사로 살아가는 삶. 이 둘은 겉으로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연료가 다르다. 전자는 언젠가 바닥나지만, 후자는 은혜의 샘에서 계속 솟아난다.

수행자의 착함을 존경하라. 그 삶에서 하나님의 일반은혜를 발견하라. 그리고 동시에, 착함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오신 그분의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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