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5:5-12
약점의 목록인가, 왕의 자화상인가
세상은 강자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당당한 자, 배부른 자, 복수할 줄 아는 자, 계산이 빠른 자, 자기편을 만드는 자, 무너뜨리는 자. 그리고 이 목록은 그대로 성공의 정의가 된다. 그런데 산상수훈의 왕은 정반대의 목록을 꺼내신다. 온유한 자, 주린 자, 긍휼한 자,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박해받는 자. 독자는 한 가지 질문 앞에 선다. 예수는 왜 세상이 “약점”이라 부르는 것을 복이라 부르셨는가.
이 여섯 복이 단순히 성품 덕목의 나열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철학책에서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은 철학이 아니다. 왕이 자기 나라를 묘사하는 선언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화상이다. 이 사실이 팔복의 나머지 문들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열게 한다.
세 개의 방향 — 자기·이웃·세상
빈손과 눈물(3-4절)이 하나님 앞에 서는 영혼의 수용적 자세라면, 5절부터는 그 영혼이 삶 속으로 들어가 빚어지는 모습이다. 배열은 무질서하지 않다. 세 개의 방향으로 묶인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역은 5-6절이다. 온유와 의에 주림은 자기 안을 향한다. 이웃을 향한 사역은 7-9절이다. 긍휼과 청결과 화평은 관계 속으로 흘러나간다. 세상을 향한 증언은 10-12절이다. 박해는 이 모든 것의 대가이자 확증이다.
하나의 집이다. 빈손과 눈물로 들어간 자는 이 여섯 방 안에서 빚어진다. 한 방만 밝고 나머지가 어둡다면 점검이 필요하다.
자기를 향하여 — 온유와 주림
온유(πραεῖς, 프라에이스)는 시편 37:11의 70인역을 그대로 인용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 시편 37:11
헬라 고전에서 이 단어는 길들여진 말(馬)에 쓰였다.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힘이 하나님의 손에 고삐가 잡힌 상태다. 민수기는 모세를 “온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온유한 자”(민 12:3)라 부른다. 그 모세는 홍해 앞에서 지팡이를 들었고 금송아지 앞에서 돌판을 깨뜨렸다. 온유는 무기력이 아니다. 자기 변호의 권리를 하나님께 맡긴 자의 내적 조율이다.
세상이 온유를 소심함·비굴함·자기 주장의 결핍으로 읽는 순간, 복음의 맛은 사라진다. 복음의 맛을 본 영혼은 자기를 증명해야 할 무게에서 해방된다.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에 더 증명할 의가 없고, 이미 사랑받았기에 더 쟁취할 사랑이 없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약속은 정복자의 약속이 아니다. 움켜쥐지 않는 자가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는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시 42:1) 지속되는 주림이다. 여기서 “의”는 개인 구원의 법정적 의에 국한되지 않는다. 칭의된 자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져 가는 성화의 의, 그리고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의 전체를 포괄한다.
배부름의 약속 호르타스테손타이(χορτασθήσονται)는 짐승이 꼴을 배부르게 먹는 단어다. 거칠고 구체적이다. 갈망은 반드시 응답받는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다. 사람은 자기 안에 없는 것을 갈망할 수 없다. 의에 대한 주림 자체가 이미 성령의 사역이며, 이미 맛본 것의 반향이다. 그대의 주린 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것이 그리스도의 배고픔과 같은 배고픔이다.
이웃을 향하여 — 긍휼·청결·화평
긍휼(ἐλεήμονες)은 구약의 헤세드(חסד)와 라훔(רחם)이 포개진 단어다. 언약적 신실과 내장이 움직이는 자비가 하나로 엮인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정의가 아니라,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흘러가는 언약적 사랑이다.
긍휼한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약속은 공로 거래가 아니다. 이미 받은 긍휼이 그 사람을 긍휼한 자로 빚었다는 증거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고, 그 자기 자신에게 부어진 그리스도의 긍휼을 보았다. 긍휼은 종적 은혜가 횡적 은혜로 흐르는 통로다.
마음의 청결(καθαροὶ τῇ καρδίᾳ)은 시편 24:4을 재맥락화한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 시편 24:4
제의적 정결의 완결이 아니다. 의도와 욕망의 단일함이다.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마음, 은밀한 계산이 없는 마음. 은밀한 우상과 은밀한 탐욕이 영혼의 시력을 흐린다. 청결한 마음은 한 분만 보기 위해 조율된 렌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단지 천국의 미래 약속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의 영적 시력이 이 약속의 선금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εἰρηνοποιοί, 에이레노포이오이)는 단순한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샬롬은 관계의 회복 전체를 뜻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기 자신 사이의 깨어진 것을 이어 붙이는 자다. 자기가 편하기 위해 침묵하는 자와 다르다. 깨어진 관계 사이에 몸을 두어 진리 위에 화평을 세우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세상을 향하여 — 박해의 복
박해(δεδιωγμένοι, 완료수동분사)는 이미 박해받은 상태를 가리킨다. 10절이 “의를 위하여”로 일반화한 후, 11절에서 예수는 인칭을 바꾸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의”와 “예수”가 등치된다.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것이 곧 예수를 위하여 박해받는 것이다.
12절의 명령은 충격적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χαίρετε καὶ ἀγαλλιᾶσθε). 뒤의 단어는 뛰어오르는 기쁨이다. 박해의 순간에 왜 뛰어오르는가. 박해가 복음의 진리됨의 증거이며, 하늘 상급의 보증이며, 이전의 선지자들과의 연대이기 때문이다. 조롱받는 그 자리가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섰던 그 자리다.
이 여섯은 그리스도의 자화상이다
팔복의 나머지는 궁극적으로 예수 자신의 초상화다. 우리가 수집할 덕목의 목록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사신 삶의 순서다.
그분은 온유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그분은 의에 주리셨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그분은 긍휼하셨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그분은 청결하셨다.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히 7:26) 대제사장. 그분은 화평을 이루셨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그분은 박해받으셨다. “그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요 15:20).
팔복은 그분의 생애를 뒤에서 따라가며 찍은 여섯 장의 사진이다. 우리가 이 초상을 닮아 가는 것은 모방이 아니다. 그분이 성령을 통해 자기 형상을 우리 안에 새기시는 것이다. 여섯 복은 여섯 개의 문이 아니라 한 집의 여섯 창이다. 한 창으로 들어온 빛이 여섯 창 모두를 비춘다.
오늘 우리에게
이 시대의 교회가 팔복을 읽을 때 가장 큰 유혹은 여섯을 선택 메뉴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온유한 편이니 의에 주린 것은 약하다. 나는 긍휼이 많으니 청결은 덜해도 괜찮다. 그러나 이 여섯은 중생한 한 영혼 안에 동시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다. 한 가지만 두드러지고 나머지가 결여되었다면,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뿌리의 문제다.
점검의 방향은 단순하다. 내 힘은 고삐가 잡혀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자기 변호의 도구로 쓰이는가. 내 갈망은 의를 향해 있는가, 성공을 향해 있는가. 내 관계는 긍휼과 청결과 화평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거래와 계산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 질문. 내가 의를 위하여,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지금 조롱의 자리에 설 수 있는가.
낮은 자리의 왕은 이미 그 길을 먼저 걸으셨다. 그분의 자화상이 우리의 자화상이 되어 간다. 이것이 산상수훈의 비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