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하박국 1–3장 핵심 구절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 하박국 1:1–4
12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 하박국 1:12–13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하박국 2:1–4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 하박국 3:17–19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
하박국의 첫 문장은 기도가 아니라 항의다. “어느 때까지리이까.”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고,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고, 율법은 해이해졌으며, 정의는 굽어졌다. 그런데 하늘은 조용하다.
이 책을 여는 질문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에서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 욥이 물었고, 시편 기자들이 물었고, 오늘 우리가 묻는다. 하박국의 독특함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받는 과정 — 그리고 답을 받고도 여전히 깜깜한 밭에 서 있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 — 에 있다.
바벨론이 심판 도구? — 더 깊어진 곤혹
하박국서는 주전 7세기 말, 유다가 내리막을 구르던 시기에 기록되었다. 요시야 왕의 개혁은 식었고, 여호야김은 불의를 되살렸다. 선지자는 이 내부 부패를 두고 외친다. 그리고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합 1:6).
그런데 이 답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깊게 만든다. 갈대아(바벨론)는 유다보다 훨씬 더 악하다.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이(합 1:13) 어떻게 더 악한 자를 도구로 쓰실 수 있는가. 이것이 하박국 1장의 두 번째 논쟁이다.
책 전체의 구조는 선명하다. 불평(1:2–4) → 응답(1:5–11) → 더 깊은 불평(1:12–2:1) → 결정적 응답(2:2–20) → 찬양(3장). 이 3중 구조는 하박국을 단순한 예언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 기록으로 만든다. 선지자는 대답을 듣기까지 파수대 위에 올라가 선다(합 2:1). 그리고 그 파수대 위에서 그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무게 있는 한 문장을 받아 적는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은 성경에서 가장 멀리 울린 문장 가운데 하나다. 바울은 이 구절을 로마서 1:17에 인용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1:17
그리고 다시 갈라디아서 3:11에 —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 그리고 히브리서 10:38에 —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구절이 신약에서 세 번 인용된 것은 드문 일이다. 이것은 하박국 2:4이 복음의 구약적 씨앗임을 증언한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이 구절을 이신칭의 교리의 성경적 중추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을 통해서다”(기독교강요 III.11.2). 그는 하박국 2:4을 두고 “선지자가 한 말이 복음의 요약”이라 단언했다.
히브리어 본문을 살펴보면 “에무나”(אֱמוּנָה)는 신뢰·신실성·견고함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다. 이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바벨론의 군화가 성문에 이르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놓지 않는, 존재 전체의 들러붙음이다. 바울은 이 “에무나”가 율법의 공로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밝혔고, 종교개혁은 이 하박국의 한 줄에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깃발을 꺼내 올렸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 섭리 안에서의 의지
그런데 이 “믿음”은 공중에 뜬 감정이 아니다. 하박국이 받아 든 답의 전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다. 갈대아를 “일으킨” 분은 여호와이시고(합 1:6), 그들이 도구로 쓰인 뒤 심판받을 것도 여호와의 작정이다(합 2:8). 악인의 번영도, 의인의 고난도, 바벨론의 흥기와 몰락도 — 모두 그분의 손 안에서 움직인다.
존 오웬은 믿음을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에 대한 이성의 동의와, 그 진리 위에서 그리스도를 붙잡는 의지의 행위”로 정의했다. 여기서 핵심은 의지의 행위다. 바벨론의 그림자가 예루살렘 위에 드리운 때, 하박국은 상황을 바꿀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것을 신뢰하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믿음은 섭리를 먼저 이해한 뒤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섭리의 어둠 한가운데서 먼저 붙잡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고립된 자아의 결단이 아니다. 오웬의 정의에서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자 믿음의 내용이다. 하박국이 붙잡은 “그 묵시”(합 2:3) —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 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언약의 묵시였다. 종말에 반드시 응하는 그 약속의 얼굴이 신약에 이르러 드러난다.
이 본문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가리키는가
하박국 2:4은 구약 안에서 이미 빛나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한 가지 긴장을 품고 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면, 그 의인은 누구인가. 율법은 해이하고 정의는 굽어졌는데, 어떤 근거로 사람이 의롭다 불릴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이 신약이다. 하박국 2:4이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오기까지 거의 600년이 걸렸고, 그 시간의 끝에 한 사람이 섰다.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실하심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우리를 대신하셨고, 그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된다. 의인이 먼저 존재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죄인을 의롭다 불리게 하고 그리하여 그 사람이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종교개혁이 “이신칭의”라 불렀던 것이다.
하박국 3장의 찬양은 이 구속의 예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옛 구원 역사를 회고하며 — 데만에서 오신 그분, 바다를 치신 그분(합 3:3, 8) — 장차의 구원을 내다본다. 사도들은 이 “장차의 구원”이 갈보리와 빈 무덤에서 이루어졌다고 증언한다. 3:13의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와 함께 구원하시려고 나오사”는 히브리어로 마쉬아흐(기름 부음 받은 자)다. 하박국의 예언은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그림자였다.
무화과나무 없는 밭에서 부르는 노래
책의 마지막 장면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 가운데 하나다. 17절은 참혹한 목록이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없고, 포도나무는 비었고, 감람나무는 말랐으며, 밭은 비었고, 양도 소도 사라졌다. 고대 유다의 경제 기반이 여섯 항목으로 하나씩 꺼져간다. 이것은 바벨론의 침공이 현실이 되었을 때의 풍경이며, 오늘 우리가 잃는 것들의 고대적 번역이다.
그런데 18절이 온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즐거워하다”(알라즈)와 “기뻐하다”(길)는 둘 다 춤추듯 소리 지르며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가리키는 강한 동사다. 물질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선지자는 춤춘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의 표지를 거룩한 감정(holy affections)에서 찾았다. 참된 감정은 상황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할 때만 기뻐하는 기쁨은 결국 무화과나무의 기쁨이다. 그러나 무화과나무가 말라도 여전히 솟구치는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박국 3:17–18은 이 둘을 벗겨놓는 결정적 구절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소출이 사라질 때 비로소 드러나는 기쁨의 근원 — 그것이 참된 신앙 감정이다.
그리고 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사슴의 발은 절벽을 가볍게 딛는다. 선지자는 지금 밭이 비어 있는 낮은 곳에 서 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높은 곳을 달리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하박국서는 세 가지를 남긴다.
첫째, 질문해도 된다는 것. 하박국은 하나님께 따졌다.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 성경의 경건은 입을 막는 경건이 아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의 항의를 꾸짖지 않으시고 답하셨다. 우리의 의심과 분노가 침묵 속에 묻히는 것보다, 파수대 위에 올라가 그분께 향하는 편이 믿음에 가깝다.
둘째, 답을 받기 전에 붙잡는 것. 하박국 2:4의 믿음은 상황이 바뀐 뒤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벨론은 여전히 오고 있었다. 묵시는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했다. 의인이 사는 방식은 결과를 본 뒤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보기 전에 그분의 말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붙잡음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밖에 이미 붙잡혀 있는 한 분 — 하박국이 내다보고 바울이 증언한 그분 — 이 계시기 때문이다.
셋째, 무화과나무 없이도 부를 노래를 준비하는 것. 오늘 우리의 무화과나무는 무엇인가. 일의 결실, 건강, 관계, 자녀의 진로, 교회의 부흥. 이 모든 것이 말라도 여전히 솟구칠 기쁨이 우리 안에 있는가. 없다면 우리는 아직 하박국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있다면 우리는 이미 사슴의 발로 높은 곳을 걷고 있는 것이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 하박국 2:3
파수대 위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다. 그분은 이미 응하셨고, 지금도 응하고 계시며, 마침내 응하실 것이다. 그때까지 의인은 —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