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큐티 중 멈춘 자리
새벽 다섯 시. 한 대학생이 시편 137편을 읽다가 마지막 절에서 손이 멈췄다.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 시편 137:9
그는 책장을 덮지 못했다. 무신론자 친구가 던진 말이 떠올랐다. “너희 신은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노래하게 한 신이잖아.” 그날 이후 그는 큐티를 멈췄다. 교회에서는 누구도 시편 137편을 설교한 적이 없었다. 어디 가서 이 질문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청년의 멈춤은 한국 교회의 거대한 사각지대를 가리킨다. 가나안 진멸, 출애굽기의 여종 규례, 시편의 저주시, 디모데전서의 여인의 침묵 — 우리는 이 본문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강단은 침묵하고, 큐티 책자는 다른 본문으로 건너뛰며, 청년부 모임에서는 누가 물으면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한국 교회의 두 거짓 처방
불편한 본문 앞에서 한국 교회가 무의식적으로 채택해 온 처방은 둘이다.
첫째는 검열이다. 강단에서, 큐티에서, 교재에서 어려운 본문을 조용히 잘라낸다. 마치 그 본문이 성경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 처방의 결과는 무엇인가? 신자가 어느 날 무신론 유튜브에서, 회의주의 책에서, 이단의 입에서 그 본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때 그 본문은 공격 무기가 되어 돌아온다.
둘째는 단순 정당화다. “하나님이 옳으시니 그냥 받아들이세요.” 이 처방은 본문을 옹호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신자의 양심을 마비시킨다. 본문 앞에서 정직하게 멈춰선 사람에게 “멈추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은, 신앙을 둔감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두 처방은 정반대로 보이지만 같은 일을 한다. 본문을 함께 읽지 못하게 만든다. 검열은 본문을 숨기고, 정당화는 본문을 닫는다. 이 글은 세 번째 길을 모색한다 — 불편함과 함께 읽는 법.
읽기 자세 다섯 원칙
① 불편함을 인정하라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경이 아니다. 성경 자체가 그 본보기를 보인다. 시편 137편은 검열되지 않은 한탄이다. 시편 88편은 위로 없이 어둠으로 끝난다. 욥기는 욥의 항의를 지우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가장 어두운 감정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당신이 시편 137:9 앞에서 멈췄다는 것은 신앙의 약점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성령이 일하시는 자리다.
② 장르를 분별하라
어려움의 절반은 장르 혼동에서 온다. 성경에는 적어도 다섯 장르가 섞여 있다.
| 장르 | 기능 |
|---|---|
| 시(詩) | 감정의 토로 — 처방이 아니라 고백 |
| 역사(史) | 사건의 서술 — 서술이 곧 승인은 아니다 |
| 율법(律) | 처방 — 시대적 그릇 안의 영원한 원리 |
| 예언(豫) | 종종 상징·과장 — 문자적 일대일이 아님 |
| 서신(書) | 논증 — 즉각적 컨텍스트가 결정적 |
시편 137:9는 시다. 처방이 아니라 한탄이다. 사사기의 잔혹한 사건들은 역사다. 서술은 승인이 아니다 — 사사기 21:25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로 끝나는 이유다. 장르를 혼동하면 본문은 금세 괴물이 된다.
③ 문맥(즉각·전체)을 읽으라
가나안 진멸 명령은 진공 속에 떠 있지 않다. 그 본문 위에는 적어도 두 개의 빛이 비춘다.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 창세기 15:16
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 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 레위기 18:24-25, 28
가나안 진멸은 인종 청소가 아니다. 그것은 400년의 회개 유예 끝에 내려진 심판이며, 같은 죄를 범하면 이스라엘 자신도 동일하게 토해진다는 동일 기준의 심판이다. 게다가 라합과 기브온의 사례는 탈출구가 열려 있었음을 보여준다. 본문 하나를 잘라내면 잔혹한 명령이 되고, 전체 안에 두면 우주의 의가 보인다.
④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으라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누가복음 24:27
가나안 진멸은 어디서 끝나는가? 골고다에서 끝난다. 헤렘(חרם, 진멸·바침)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대신 서신 사건이 십자가다.
46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마태복음 27:46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 갈라디아서 3:13
구약의 헤렘은 그림자였다. 실체는 그리스도가 우주의 헤렘 자리에 친히 들어가신 사건이다. 가나안 진멸을 그리스도 없이 읽으면 잔혹사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읽으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들어가신 그 자리의 무게가 보인다.
⑤ 겸손의 자리에 머물라
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 신명기 29:29
모든 것이 명료해야 신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본문은 끝까지 덮인 채로 남는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피조물의 자리를 인정한다. 이는 사고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다. 욥은 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답을 가지신 분을 만났다.
네 가지 표본 케이스
가나안 진멸 — 위에서 본 대로, 창 15:16 + 레 18 + 라합·기브온의 탈출구 + 갈 3:13의 그리스도 헤렘. 이 다섯이 모이면 본문은 닫히지 않는다.
출 21:7-11 여종 규례 — 고대 근동 법전(함무라비)과 비교하면 출애굽기는 그 시대의 노예제를 처방한 것이 아니라 제한한 것이다. 약자 보호의 활시위가 당겨지고 있었다. 종착점은 갈라디아서 3:28(“종이나 자유인이나 …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이다. 본문을 정지된 한 점으로 읽지 말고 어디로 향하는 활시위로 읽어야 한다.
시편 저주시 — 시편 109편, 137편은 검열되지 않은 정직이다. 그것은 살인적 분노를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채권자 자리를 하나님께 양도하는 자리로 인도된다 — 로마서 12:19,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저주시는 처방이 아니라 분노의 성화 과정이다.
딤전 2:12 여인의 가르침 — 에베소 컨텍스트(1세기 아데미 신전 도시, 거짓 교사 침투)를 떠나면 본문이 절대화된다. 동일한 바울이 갈 3:28을 썼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여인들을 세우신 분이 그리스도다. 이 본문도 시대의 그릇 안에서 읽어야 한다.
불편함의 신학
불편함은 두 얼굴을 가진다.
하나는 내 도덕 감각의 절대화에서 오는 불편함이다. 로마서 1:21-22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우리의 도덕 직감은 일반은혜의 산물인 동시에 죄로 굴절되어 있다. 내 직감이 본문을 거부한다는 사실이 본문이 틀렸다는 자동 결론을 주지는 않는다.
다른 하나는 성령이 일하시는 자리로서의 불편함이다. 성령은 종종 우리의 자기 의를 해체하시기 위해 본문 앞에 우리를 멈추신다. 그 멈춤은 회개와 그리스도 의지의 출발점이다.
두 불편함을 분별하는 시금석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7:17이다.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 요한복음 7:17
알기 위해 행하려는 의지가 먼저다. 불편함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 옳은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알고자 하는 자세에 있는가?”이다.
본문이 나를 심문하는 자리
성경 앞에서 우리는 판사석에 앉지 않는다. 우리는 피고석에 선다. 본문이 거짓말한 적은 없다. 본문이 나를 심문하는 자리에 머무는 것 — 그것이 신앙이다.
한국 강단을 향한 호소: 어려운 본문을 잘라내는 강단은 신자의 의심을 외부의 손에 넘긴다. 강단은 본문을 함께 읽어주는 자리여야 한다. 검열도 정당화도 아닌, 함께 머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다시, 새벽 다섯 시
처음의 청년에게 돌아가자. 그는 시편 137:9를 다시 읽는다.
답을 받지 못한다. 어쩌면 평생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 본문이 그를 떠나지 않는다. 그가 멈춰 선 그 자리에서, 본문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붙드심이 — 어쩌면 — 성령이 일하시는 첫 신호다.
본문 앞에 머물라. 불편함을 죽이지 말라. 함께 읽는 법을 배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