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가 더 합리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많은 청년 신자가 속으로 움찔한다. “나는 믿음으로 살고 저들은 증거로 산다. 저들이 더 정직한 것 아닌가?” 신앙은 감정이고 무신론은 이성이라는 묵시적 전제가 이 구도를 만든다.
이 글은 그 느낌이 착시임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러려면 “무신론이 합리적인가”에 뛰어들기 전에 합리성이란 무엇이며, 그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증거라는 말 뒤에 숨은 기울어진 운동장
무신론자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할 때, 그는 이미 어떤 종류의 것만이 증거로 인정되는지 정해 놓고 있다. 통상 그 기준은 “반복 실험으로 관찰·측정 가능한 경험 데이터”다. 그러나 이 기준 자체는 실험실에서 검증된 적이 없다. 그것은 자연주의라는 형이상학적 전제다.
자연주의가 진리라면 물질과 에너지의 상호작용 외에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연주의 자체는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명제이고, 명제는 논리 법칙·수학적 진리·이성의 신뢰성 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자연주의자는 자기가 딛고 선 발판을 자기 체계 안에서 설명하지 못한다.
이성의 신뢰성을 보자. 자연주의가 참이라면 뇌는 맹목적 진화가 생존을 위해 빚은 신경세포 덩어리다. 진화는 생존에 유리한 믿음을 선택할 뿐 참된 믿음일 필요가 없다. 원시인에게는 “덤불 뒤에 호랑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과잉 공포가 진실보다 생존에 유리했다. 그렇다면 우리 인지 능력이 진리에 도달한다는 보증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연주의 안에서는 오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주의는 자기 결론의 근거인 이성 자체를 부식시킨다.
합리성을 떠받치는 질서·이성의 신뢰성·논리의 보편성을 무신론은 설명하지 못한 채 빌려 쓴다.
과학이라는 방법, 과학주의라는 신화
두 번째 착시는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신화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관찰·측정·예측하는 방법이며 자기 영역 안에서만 작동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과학을 세계관으로 둔갑시킨다.
과학은 원리상 답하지 못한다. 왜 무(無)가 아니라 유(有)가 있는가. 왜 우주는 이해 가능한가. 왜 인간에게 의식이 있는가. 왜 도덕적 의무는 구속력을 가지는가. 이것은 과학의 실패가 아니라 과학의 범위를 넘어선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대중적 무신론이 이 한계를 감추고 과학을 신앙의 대체물로 삼을 때, 그것은 이미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scientism)다. “관찰 가능한 것만 실재한다”는 명제 자체가 관찰 가능하지 않다. 자기 발아래가 텅 빈 체계다.
삶이 무신론을 배반한다
더 결정적인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다. 우주가 정말 우연과 입자의 춤에 불과하다면,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공기 분자의 진동, 어머니의 사랑은 유전자의 계산, 정의를 향한 분노는 뇌의 경련일 뿐이다. 그러나 일관된 무신론자도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학살에 분노하고, 자식을 사랑하며, 거짓말을 꾸짖는 반응은 객관적 선·악·의미를 전제로 한다. 무신론적 우주에는 그런 것이 존재할 자리가 없다. 이 불일치야말로 무신론 안에 새겨진 지문이다.
성경은 이 현상을 오래전에 진단했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로마서 1:18-21
바울은 무신론을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진리를 억누름(suppress)이라 진단한다. 인간은 창조 세계와 자기 양심 속에서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 앞에 무릎 꿇기를 원하지 않기에 그 욕망을 지적 논증으로 합리화한다. 많은 무신론 논증이 정교한 형식을 갖추고도 끝내 설득력이 약한 이유는, 그것이 결론이 아니라 이미 내린 결정에 대한 사후 변호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같은 진단을 날카롭게 압축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 시편 14:1
히브리어 ‘어리석은 자’(nabal)는 지능의 저하가 아니라 도덕적 왜곡이다. “하나님은 없다”는 머리의 결론이 아니라 마음의 선택이며, 그 선택 뒤에 논증이 따라붙는다.
질문을 되돌려주는 용기
그러므로 신앙을 변호해야 한다고 느끼는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증거 목록이 아니라 질문의 방향을 바로잡을 용기다.
“기독교는 증거가 없다”는 말에 되물으라. “자네가 말하는 ‘증거’의 기준은 어떤 증거로 증명되었는가?”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말에 되물으라. “그 명제는 과학으로 증명되었는가?” “종교는 비합리적이다”라는 말에 되물으라. “자네가 지금 사용하는 논리 법칙·도덕적 분노·진리 추구의 열망은 무신론적 우주에서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이 질문들은 공격이 아니라 정직한 초대다. 무신론자도 유신론자도 모두 증명되지 않은 전제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함께 인정하고, 어느 전제가 우주의 질서·이성·도덕·아름다움을 더 일관되게 설명하는지 따져 보자는 초대.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썼다.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 고린도전서 1:20-21
기독교는 이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을 선물하신 하나님을 예배한다. 두려워할 것은 이성이 아니라 이성을 우상으로 삼는 태도다. 무신론은 결론이 아니라 또 하나의 형이상학적 신앙이다. 이 사실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순간, 기울어진 운동장은 평평해지고 질문은 비로소 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