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한복판의 미친 사람
니체가 「즐거운 학문」 §125에서 묘사한 장면은 이렇다. 환한 대낮에 한 미친 사람이 등불을 켜 들고 시장으로 달려와 외친다. “나는 신을 찾는다! 나는 신을 찾는다!” 시장에 모여 있던 무신론자들이 웃는다. 그러자 미친 사람이 그들을 노려보며 외친다.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라. 우리가 그를 죽였다 — 너희와 내가. 우리가 이 지구를 태양으로부터 풀어 놓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한 것이냐? 이제 지구는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가? 모든 태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끝없는 무(無) 속으로 추락하고 있지 않은가?”
군중은 침묵한다. 미친 사람은 등불을 땅에 내던지며 말한다. “내가 너무 일찍 왔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 사람들의 귀에 닿지 못했다.”
이 장면은 무신론의 승리 선언이 아니다. 무신론의 비용 청구서다. 니체가 두려워한 것은 신앙이 아니라, 신앙이 떠난 후의 공백이었다. 그는 시장의 무신론자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조차 모른 채 “신 없이도 도덕은 그대로”라고 자위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머리를 자르고 몸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 니체는 정직하게 외쳤다 — 너희가 한 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너희는 모든 것을 끌어내렸다.
130년이 지났다. 니체의 예언은 어디까지 왔는가.
토대를 자르고 건물만 남기려 한 사람들
서구 근대는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1단계는 계몽주의의 자기기만이다. “신의 존재는 부정한다. 그러나 신이 떠받치던 도덕·의미·인간 존엄은 그대로 유지하겠다.” 칸트의 정언명령, 콩트의 인류교, 밀의 공리주의가 모두 이 시도였다. 토대는 잘라내되 건물은 그대로 두려는 시도.
2단계는 니체의 폭로였다. 토대가 사라졌는데 건물이 그대로 서 있을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 폭로 이후, 정직한 무신론자들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쪽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입을 빌려 정식화한 명제를 받아들였다 —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것이 사상에 머물지 않고 사회로 흘러간 결과가 20세기였다. 스탈린의 굴라크, 마오의 문화혁명, 폴 포트의 킬링필드, 그리고 홀로코스트. 무신론적 전체주의들은 한결같이 “신이 없으니 인간이 신이다”라는 전제 위에서 작동했고, 인간을 신의 자리에 올린 결과는 인간의 대량 학살이었다.
다른 한 쪽은 사르트르와 카뮈로 대표되는 정직한 절망이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에서 인정했다. 신이 없다면 인간은 본질 없이 실존에 던져진 존재이며, 매 순간 자기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다. 그는 마지막에 인간을 “쓸모없는 정념(passion inutile)“이라 불렀다.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1942)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신이 없다면 인간은 매일 아침 “왜 오늘도 살아야 하는가”에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의 답은 영웅적이었다 — 의미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항하기로 선택하라. 그러나 살아낼 수 없는 답이었다. 시지프처럼 매일 돌을 굴려 올릴 의지를 평범한 사람에게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21세기에 도킨스·해리스·데닛·히친스의 신무신론이 등장한다. 그들은 니체보다 훨씬 명랑하다. “신 없이도 도덕은 가능하다. 진화가 우리에게 협력의 본능을 주었고, 이성이 그것을 다듬는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이성·도덕·인간 존엄은 어디서 왔는가. 2천 년간 기독교 세계관이 축적한 자본의 이자다. 그들은 자본의 이자로 살면서 자본 자체는 부인한다. 이것이 빌려온 도덕 자본(borrowed moral capital)의 문제다.
우주가 우연이라면 — 도킨스의 자기 모순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무신론은 단지 “신은 없다”는 한 명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 명제는 우주에 대한 한 가지 그림을 함께 가져온다 — 우주는 인격적 의도 없이 우연한 물질의 충돌로 생겼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원자의 운동에 불과하다는 그림.
그렇다면 도킨스가 책을 쓰는 행위는 무엇인가. 그것도 결국 그의 두뇌 속 원자 운동이다. 그가 옳다고 느끼는 것과 그가 옳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우주가 인격적 로고스에 의해 지어지지 않았다면, 한 사람의 두뇌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외부 실재와 진리 대응 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다. 도킨스가 종교를 비판하는 그 순간, 그가 의존하는 이성·논리·설득의 가능성 자체가 유신론적 우주의 산물이다.
요한복음의 첫 문장이 이 모든 것의 토대를 한 줄로 선언한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요한복음 1:1-3
말씀(Logos) — 인격적 이성. 우주는 인격적 이성에 의해 지어졌다. 그러므로 우주 안에는 의미·질서·아름다움이 우연이 아니라 본질로 새겨져 있다. 무신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의미를 발견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뿐이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생망 — 사상은 결국 거실로 흐른다
사상은 책장에 머물지 않는다. 결국 거실과 병실과 지하철로 흐른다. 21세기 한국에 그것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라.
청년 자살률 OECD 1위. 이생망이라는 신조어 — “이번 생은 망했다.” 30대 직장인이 정신과 외래에서 가장 자주 호소하는 말은 분노도 슬픔도 아니라 “그냥 의미를 모르겠어요.” “안락사 청년”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 진단 소견을 만든 사상의 뿌리가 무엇인가. 시지프가 한국 청년의 이름으로 환생한 것이다. 매일 돌을 굴려 올리되, 의미는 본인이 만들어내야 한다는 명령. 그 명령을 견디지 못한 영혼들이 무너지고 있다.
신무신론자들은 이렇게 답한다 — “신 없이도 의미를 만들 수 있다. 가족, 일, 예술, 정의를 위해 살면 된다.” 좋다. 그런데 그 가족이 죽고, 그 일이 무너지고, 그 정의가 배신당하는 날 — 그날 무엇이 남는가. 의미를 내가 만들어낸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는 말의 우아한 번역이다. 내가 만든 의미는 내가 거두어들일 수 있다. 내가 부여한 가치는 내가 박탈할 수 있다. 영혼은 본능적으로 안다 — 진짜 의미는 나보다 큰 곳에서 와야 한다는 것을.
어거스틴이 「고백록」 1권에서 진단한 그대로다. 주께서 우리를 주를 향하여 지으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주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평안이 없나이다. 1,600년이 지났지만 이 한 문장이 21세기 정신의학의 가장 깊은 통찰보다 깊다. 현대인의 우울은 의학적 우울 이전에 신학적 우울이다. 영혼이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을 때 나타나는 금단 증상.
의미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기독교의 응답은 단순하다. 의미는 인간이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작정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시편 8편이 이것을 노래한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 시편 8:3-5
여기 의미의 비밀이 있다. 주께서 그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의미는 수여되는 것이다. 무신론적 인본주의는 인간이 인간에게 존엄을 부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서 박탈할 수 있다. 이것이 20세기 전체주의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존엄을 박탈할 수 있다는 결정.
로마서 8장의 황금사슬은 한 사람의 생애를 영원의 작정으로부터 영원의 영광까지 한 줄로 꿰뚫는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로마서 8:29-30
이 사슬은 무신론자에게는 없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생애는 우연한 시작과 우연한 끝 사이의 우연한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사슬이 있는 자에게 한 사람의 생애는 영원의 작정 안에서 호명된 한 음표다.
성소에서 일어나는 전환
시편 73편 아삽의 고백이 더 친밀하다. 그는 악인의 형통을 보고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 시편 73:2-3
이것이 무신론적 허무주의로 미끄러지기 직전의 영혼의 모습이다. 왜 정의는 보상받지 못하는가. 왜 악은 번성하는가. 신이 있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가 허무에서 빠져나온 전환점은 어디였는가.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 시편 73:17
성소에서.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의미는 추론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임재 안에서 발견된다. 카뮈가 시지프의 돌을 굴리는 영웅적 의지로 의미를 만들어내려 했을 때, 아삽은 단지 성전 문턱을 넘었을 뿐이다. 그 차이가 모든 것을 갈랐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이 모든 것을 한 줄로 요약한다 —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의미는 기능(function)이 아니라 관계(relation)다. 무신론은 인간을 기능으로 환원한다 — 유전자 운반체, 경제 단위, 사회 기여자. 기독교는 인간을 관계로 회복한다 — 사랑받는 자, 부름받은 자, 영원히 즐거워할 자.
자정에 깨어 있는 회의주의자에게
이 글을 의심하며 읽고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한다. 도킨스를 읽었고 카뮈를 읽었고, 일요일 아침마다 친구의 교회 초대를 정중히 거절해 온 사람. 머리는 무신론자의 진영에 서 있다. 그러나 그 머리도 자정에 홀로 깨어 있을 때는 묻는다 — 이것이 다인가.
그 물음은 신무신론이 가르친 의문이 아니다. 그 물음은 창조 시 영혼에 새겨진 송신기가 아직도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증거다. 칼뱅이 「기독교 강요」 1권 3장에서 신성에 대한 감각(sensus divinitatis)이라 부른 그것. 노을 앞에서, 첫아이의 울음소리 앞에서, 어느 새벽의 정적 앞에서 영혼이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를 향해 무릎을 꿇으려 하는 그 떨림.
니체의 미친 사람은 옳았다. 신을 죽이는 것은 곧 모든 태양으로부터 풀려나 끝없는 무 속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 추락 한가운데로 손을 뻗는다. 의미는 발명할 수 없다. 그러나 발견할 수는 있다. 그것은 시장의 등불 아래가 아니라 성소의 문턱에서 일어난다. 그 문턱은 지금도 열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