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욕은 죄인가 — 창조의 선물, 타락의 왜곡, 복음의 회복

> 성욕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영지주의이고, 방치하는 것은 목회적 실패다. 성경은 제3의 길을 말한다.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성윤리, 창조와타락, 성화, 복음과삶
- 게시일: 2025-06-26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sexual-desire-and-gospel/
- 컬렉션: blog

---

이 질문 앞에서 교회는 오랫동안 두 가지 실패를 반복해 왔다. 하나는 **정죄**다. 성욕을 입 밖에 꺼내는 것 자체를 부끄러운 일로 만들어, 성도들이 혼자서 전쟁을 치르게 했다. 다른 하나는 **침묵**이다. 불편한 주제를 피함으로써, 결국 세상의 목소리가 그 빈자리를 채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주제를 피하지 않는다. 아가서가 정경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이 성적 사랑을 어떻게 보시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 아가 1:2

문제는 성욕의 **존재**가 아니다. 문제는 성욕의 **방향**이다.

## 하나님이 설계하신 것

창세기는 인간의 성적 결합을 창조의 클라이맥스 가까이에 배치한다.

>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창세기 2:24

"한 몸"이라는 표현은 성적 욕구를 **전제**한다. 하나님은 이 욕구를 인간에게 심어 놓으신 뒤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다. 몸의 욕구를 원리적으로 악하다고 보는 시각은 기독교가 아니라 영지주의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대로,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다 — 회복한다(_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restaurat_). 칼뱅도 동일한 원리를 확인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 측면에만 부여된 것이 아니라, 몸을 지닌 전인격적 존재에게 부여되었다. 성욕은 그 형상의 일부다.

그러므로 성욕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수치가 아니라 **감사**다.

## 선물이 무기가 될 때

그러나 우리는 에덴이 아니라 에덴 **밖**에서 살고 있다. 타락 이후 성욕은 변질되었다. 야고보서는 그 과정을 정밀하게 해부한다.

>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야고보서 1:14-15

성욕 자체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내주하는 죄(indwelling sin)는 이 선한 욕구를 통로 삼아 작동한다. 욕구가 하나님의 설계를 벗어나 자기 만족의 최종 목적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성욕이 아니라 **정욕**이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경고하신 것도 바로 이 전환점이다.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5:28

이 말씀은 성적 끌림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욕구가 정욕으로 **전화하는 마음의 운동** — 상대를 인격이 아닌 대상으로 환원하고, 언약 밖에서 소유하려는 의지적 방향 전환 — 을 가리킨다.

다윗의 비극이 이를 증명한다. 눈길이 탐심이 되고, 탐심이 간음이 되고, 간음이 살인이 되었다. 죄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항상 더 멀리 끌고 간다.

로마서는 이 왜곡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밝힌다.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 로마서 1:24-25

성적 왜곡은 독립된 도덕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결과다. 성욕이 하나님보다 크게 느껴지는 순간, 그것은 이미 **우상**이 되어 있다.

##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것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하지 말라"는 금지 목록인가?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분석했듯이, 의지는 항상 가장 강한 동기를 따른다. 금지만으로는 정욕을 이길 수 없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영혼의 갈증이 더 깊은 곳에서 채워져야 한다.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 시편 42:1

싸움의 본질은 욕망의 **말살**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 재정립**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유혹보다 더 크고 달콤하게 느껴질 때, 의지는 방향을 바꾼다. 썩은 물을 탐내는 것은 맑은 시냇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갈라디아서 5:16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로마서 8:13

죄 죽임(mortification)은 성령의 사역이다. 우리의 몫은 성령께 의존하면서 구체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욕망이 발생하는 단계에서 차단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정욕을 대체하며, 말씀과 공동체 안에 자신을 두는 것이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 보여 준 무기는 도덕적 결의가 아니었다.

>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 창세기 39:9

**하나님 의식** — 이것이 요셉의 방패였다. 그리고 그는 도망쳤다. 도망은 비겁함이 아니라 지혜다.

## 이미 넘어진 자에게

이 글을 읽으며 수치심에 눌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미 넘어졌다고, 너무 멀리 와 버렸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성경은 정죄가 아니라 은혜를 먼저 내민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 뒤에 시편 51편을 썼다. 그가 호소한 근거는 자기 회개의 진정성이 아니었다.

>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 시편 51:1

다윗은 자신의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인자, 언약적 사랑)를 근거로 삼았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먼저 건네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생수였다. 바울도 같은 진리를 선언한다.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로마서 8:1

**은혜가 먼저, 명령이 나중이다.** 이것이 복음의 순서다.

## 교회가 해야 할 일

미혼 청년에게는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소그룹이 어떤 설교보다 실제적인 방패가 된다. 기혼 성도에게는 결혼 안의 성적 친밀함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바울은 이것을 권고가 아니라 **의무**로 말했다.

>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 고린도전서 7:3

비자발적 독신의 자리에 놓인 이들에게도 교회는 말해야 한다. 바울은 독신을 열등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로 보았다.

>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 고린도전서 7:7

그리고 넘어진 성도 앞에서 교회는 정죄의 손가락이 아니라 복음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

성욕은 죄가 아니다. 창조의 선물이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에서 이 선물은 끊임없이 왜곡의 압력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욕망이 본래의 자리를 되찾도록 하는 것이다.

당신의 죄보다 그리스도의 피가 더 크다. 이것이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