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자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 과학과 신앙이 충돌한다는 대중적 통념은 어디서 왔으며, 정말 사실인가. 두 책 신학과 과학사의 증언으로 오해를 풀어낸다.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변증, 과학과신앙, 두책신학, 일반계시
- 게시일: 2026-09-11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scientist-and-faith/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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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성인이라면 신앙을 버려야 한다"는 속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는 하나의 공식이 자리 잡았다. **과학 = 이성 = 지성인**, **신앙 = 감정 = 미신**. 이 공식에 따르면 과학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신앙을 가진 순간 그는 과학자 자격을 절반쯤 반납한 셈이 된다.

그런데 이 공식을 한 번이라도 정면으로 검증해 본 사람은 드물다. 관성처럼 받아들여진 전제 위에서 신앙인은 방어에 급급하고 불신자는 승리감에 취한다. 그러나 공식의 뿌리를 파 보면 어느 쪽도 세워지지 않는 얕은 지반이 드러난다. 과학과 신앙의 충돌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범주의 혼동**이며, 이 혼동을 풀면 오히려 과학이 깊어질수록 경외도 깊어진다는 옛 전통이 다시 선명해진다.

## 하나님은 두 권의 책을 쓰셨다

개혁주의 전통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문제에 답을 가지고 있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1권 5장에서 하나님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가르쳤다. 하나는 **자연의 책**(liber naturae)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의 책**(liber Scripturae)이다. 시편 기자는 그 첫 번째 책을 이렇게 노래한다.

>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
>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
>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
>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
> — 시편 19:1-4

바울은 이 자연의 증언이 단순한 시적 수사가 아니라 **법정적 증거**라고까지 말한다.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
> — 로마서 1:20

그렇다면 자연을 가장 가까이에서 읽는 사람, 곧 별의 궤도를 계산하고 세포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과학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창조주가 쓰신 첫 번째 책의 한 문장을 정성껏 해독하고 있는** 것이다. 현미경 한 칸, 수식 한 줄은 본래 예배의 재료다.

다만 칼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죄로 인해 인간의 시력이 흐려졌기 때문에, 자연의 책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성경이라는 **안경**(oculis Scripturae)을 써야 자연이 보여주는 영광의 의미가 비로소 초점을 맞춘다. 두 책은 경쟁하지 않는다. 한 분 저자께서 쓰셨고, 서로를 해석한다.

## "과학이 신앙을 제거했다"는 주장의 범주 오류

그렇다면 왜 충돌이 있다고 느껴지는가. 그 원인은 두 책의 장르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어떻게**(how)를 묻는 방법론이다. 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세포가 어떻게 복제하는가. 신앙은 **왜**(why)와 **누가**(who)를 다룬다. 이 별은 왜 존재하는가, 누가 이 생명을 빚으셨는가. 망원경으로 영혼을 찾지 못했다고 영혼이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자로 음악을 재지 못했다고 음악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용한 도구가 애초에 그 대상을 포착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을 뿐이다.

바빙크는 이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 atque restaurat). 창조 질서는 구원 질서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가 수학적으로 기술 가능하다는 것, 그 질서를 인간의 이성이 포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신학적 사실이다. 우연의 먼지 회오리에서는 법칙이 생겨나지 않고, 무의미에서는 의미가 읽히지 않는다. 요한은 그 이유를 정확히 가리킨다.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 — 요한복음 1:1-3

창조주의 **로고스**(λόγος)가 우주에 새겨져 있고, 인간은 그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래서 우주는 읽힌다. 과학이 가능한 것 자체가 기독교 유신론의 전제 위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 과학사는 누구의 편인가

대중적 통념과 달리 근대 과학의 설계도를 그린 사람들은 거의 모두 유신론자였다. **케플러**는 천체의 궤도를 계산하며 "하나님을 좇아 그의 생각을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와 거의 같은 분량의 신학 저작을 남겼다. **로버트 보일**은 기독교 변증서를 썼고 유언으로 변증 강좌를 설립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평생 소규모 교단의 평신도 장로로 예배를 인도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캐번디시 연구소 입구에 새기게 한 구절은 시편 111편 2절이었다.

>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
> — 시편 111:2

오늘날에도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이끈 **프랜시스 콜린스**는 무신론자였다가 C. S. 루이스를 읽고 회심한 후 복음주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한다. 이들이 신앙을 **양보하면서** 과학을 한 것이 아니다. 우주가 무질서한 우연이 아니라 **인격적 창조주의 이성적 작품**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법칙을 탐구할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신앙은 그들의 과학을 억압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학에 동기를 주었다.

## 그럼에도 믿지 못하는 이유

여기까지 오면 문제가 다시 솟아난다. 이 모든 논증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끝내 하나님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대체로 **과학 자체가 아니다**. 의사 출신의 한 설교자는 이 지점을 단호하게 진단한다. 사람이 신앙을 거부하는 가장 흔한 이유는 데이터 부족이 아니라 **자존심**이다.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파악할 수 있어야만 믿겠다"는 선언은 엄밀히 말해 과학의 결론이 아니라 타락한 마음의 자기 주장이다. 과학은 그것을 지지해 준 적이 없다.

골로새서는 과학자와 농부와 어린아이 앞에 동일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을 가리킨다.

>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 — 골로새서 1:16-17

은하의 질량이 그 안에 서 있고, 분자의 결합이 그 안에 서 있다. 과학자가 발견하는 모든 법칙은 이미 그분께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과학자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거꾸로 된 질문이다.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그가 날마다 해독하고 있는 그 책의 저자를, 과연 모른 척하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연구실의 불빛 아래에서, 실험대의 침묵 속에서, 수식이 갑자기 풀리는 그 순간의 작은 전율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두 번째 책이 첫 번째 책을 향해 건네는 초대다. 현미경을 내려놓고, 페이지를 넘겨 보라는 초대. 그곳에서 우주의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