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정론 2부: 그래도 전도해야 하는 이유

> 유기의 문제, 운명론과의 차이, 전도의 동기, 그리고 예정론이 신자에게 주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까지 — 예정론의 나머지 절반을 마주한다.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변증, 예정론, 구원론, 개혁주의
- 게시일: 2026-08-02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predestination-election-2/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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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의 그림자

1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세 전에 일부를 선택하셨다는 성경의 증언을 따라갔다. 그리고 이 선택이 불공정이 아니라 은혜라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동전에는 뒷면이 있다. 하나님이 일부를 선택하셨다면,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가?

신학에서 이것을 **유기**(reprobation)라 부른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 선택과 유기는 **대칭적이지 않다.**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사용한 언어를 주목하라.

>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
> — 로마서 9:22-23

"멸하기로 준비된"(22절) — 여기서 행위자가 명시되지 않는다. 반면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23절) — 여기서는 하나님이 주어다. 바울의 언어 자체가 비대칭을 담고 있다. 선택에서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예비하신다." 유기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그 죄 가운데 "내버려 두신다."

벨직 신앙고백 16조는 이 비대칭을 더 선명하게 고백한다.

>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택하신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건지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을 던진 타락과 멸망 가운데 내버려 두십니다.

"건지신다"는 적극적 행위다. "내버려 두신다"는 소극적 행위다. 하나님은 죄 없는 존재를 이유 없이 정죄하지 않으신다. 유기된 자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정당한 심판을 받는 것이다 — 하나님이 그들에게 죄를 강요하신 것이 아니다.

이 구분을 놓치면 예정론은 괴물이 된다. 이 구분을 붙잡으면,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가 동시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운명론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다면, 그것은 결국 운명론 아닌가?" 이 질문은 예정론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에서 나온다. 그러나 예정론과 운명론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운명론**(fatalism)은 비인격적이고 맹목적인 필연이다. 아무도 통제하지 않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인간의 의지는 환상이다. 그리스 비극의 세계관이 이것이다 —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피하려 할수록 운명 속으로 빠져든다.

**개혁주의의 예정론**은 인격적 하나님의 지혜로운 작정이다. 하나님은 목적만 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까지 함께 정하셨다. 그리고 그 수단에는 인간의 의지와 선택이 포함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장 1절은 이 점을 정교하게 고백한다 —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이차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성이 제거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확립된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고 **세우신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외부의 강제에 의해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부패한 본성이 원하는 바대로 거부한다. 그것은 진정한 그의 선택이다. 따라서 그에게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같은 층위에서 충돌하는 두 명제가 아니다 — 일차 원인(하나님)과 이차 원인(인간)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한 창조주 앞에서 만나는 **신비**다.

## 예정론이 전도를 죽이는가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이미 정하셨다면, 전도는 왜 하는가?" 이 질문은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이 수단을 함께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되, **복음 전파를 통해** 구원하신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 — 로마서 10:14-15

전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시간 속에서 실현되는 수단이다. 바울 자신이 이 확신 위에서 전도했다. 고린도에서 핍박을 당할 때,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

>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
>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
> — 사도행전 18:9-10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물러서지 않았다. 복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예정론은 전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전도에 **확신**을 준다.

역사가 이것을 증명한다. 조지 휫필드, 찰스 스펄전, 윌리엄 케리 — 교회사에서 가장 강력한 예정론자들이 가장 열렬한 전도자들이었다. 예정론을 깊이 믿었기 때문에 담대했다.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으므로,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

##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착각

예정론에 대한 또 하나의 반발이 있다. "다 정해져 있다면, 내가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 아닌가?" 바울은 이 착각을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이미 부수어 놓았다.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 — 에베소서 1:4

선택의 목적이 무엇인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 내버려 두시려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거룩함을 향해 선택하셨다. 성화는 선택의 열매이며, 하나님이 작정하신 수단이다.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나태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거룩하게 살려고** 한다. 선택이 거룩함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끊어지지 않는 황금 사슬

예정론이 신자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확신**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구원의 전 과정을 하나의 사슬로 연결한다.

>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 — 로마서 8:29-30

미리 아심 → 미리 정하심 → 부르심 → 의롭다 하심 → 영화롭게 하심. 신학자들은 이것을 구원의 "**황금 사슬**"(catena aurea salutis)이라 불렀다. 이 사슬의 어느 고리도 끊어지지 않는다. 미리 아신 자는 반드시 영화롭게 된다. 중간에 탈락하는 사람이 없다.

바울은 이 확신 위에서 로마서 8장의 위대한 선언으로 나아간다.

>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
>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 — 로마서 8:33, 38-39

이것이 예정론이 도착하는 곳이다. 공포가 아니라 확신. 불안이 아니라 안식. 내 구원이 내 붙잡는 힘에 달려 있다면 나는 매일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내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근거해 있다면 — 어떤 피조물도 나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 돌아보는 자에게 보이는 풍경

예정론은 신학의 입구가 아니라 출구다. 아직 믿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은 택함받았느냐"고 묻는 교리가 아니다. 이미 믿는 사람이 자신의 여정을 돌아보며 발견하는 진리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내 결단 때문이 아니었다. 나의 지혜도, 나의 의지력도, 나의 선한 본성도 아니었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시고, 때가 되었을 때 성령으로 나를 부르시고, 믿음까지 선물로 주신 분이 계셨다.

이 발견 앞에서 나오는 유일한 반응은 — 바울이 그랬듯이 — 찬양이다.

예정론은 불편한 교리가 아니다. 우리가 불편해하는 것은 은혜가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 곧 우리가 구원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쉴 수 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