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법의 셋째 용도는 자유인가 멍에인가 — 칼뱅·로이드존스·바빙크가 한 자리에서 충돌하다

> 신자의 손에 들린 십계명은 안내자인가, 다시 메는 멍에인가. 셋째 용도를 둘러싼 세 거장의 강조점이 부딪치는 자리에서 개혁주의 윤리의 중심을 다시 묻는다.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패널토론, 율법, 성화, 자유
- 게시일: 2026-06-14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panel-debate-law-third-use/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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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심한 후 십계명을 다시 펼쳐도 되나요"

새벽기도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한 청년이 목사를 붙들었다. "목사님,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들었는데, 왜 저는 다시 십계명을 책상 앞에 붙여 두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이게 신앙의 후퇴인가요, 진보인가요." 정직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 한 질문 위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미묘한 균형 하나가 흔들린다.

문제의 이름은 **율법의 셋째 용도**(*tertius usus legis*)다. 칼뱅이 「기독교 강요」 2권 7장 6절부터 12절에서 정리한 율법의 세 용법 가운데 마지막 — 곧 **이미 거듭난 신자에게 율법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첫째 용도는 시민적 용도(사회의 외부 행동을 통제), 둘째는 거울 용도(죄인에게 자기 모습을 비춰 그리스도께로 몰아감), 그리고 셋째가 안내 용도다. 셋째 용도는 자유의 길인가, 자유 위에 다시 얹는 멍에인가. 한 자리에 칼뱅과 로이드존스와 바빙크를 앉혀 두면, 같은 진리에서 갈라지는 강조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 칼뱅 — "셋째가 주된 용도다"

칼뱅의 입장은 단호하다. 그는 셋째 용도를 단순히 셋 중 하나가 아니라 **고유한 용도**(*usus proprius*), **주된 용도**(*usus praecipuus*)라고 불렀다. 율법의 본래 목적이 거기서 가장 온전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신자에게 율법은 두 가지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히 보여 주고, 게으른 육신을 깨워 순종으로 자극한다. 멍에가 아니라 사랑하는 분의 뜻을 적어 보낸 **편지**다.

>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 시편 119:97

다윗의 입술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율법이었다. 그것이 멍에로 들리는 자는 아직 셋째 용도를 모른다고 칼뱅은 말한다. 멍에는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으로 의를 세우려는 옛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하셨다. 폐기된 것은 율법의 **저주**이지 율법의 **내용**이 아니다.

## 로이드존스 — "셋째 용도는 가장 미묘한 함정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로이드존스가 같은 신학 안에서 다른 강조점을 던진다. 그는 칼뱅에 동의한다. 그러나 21세기 강단에 서서 회중을 진단하는 의사로서, 그는 한 가지를 더 말해야 한다고 본다. **셋째 용도는 옳지만, 그것이 동력의 자리에 잘못 놓일 때 가장 미묘한 위험을 낳는다.**

그가 로마서 7장을 강해하면서 거듭 보여 준 것이 이것이다. 신자도 율법 앞에 서면 자기 안의 죄가 깨어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는 **불신자의 외침이 아니라 거듭난 바울의 외침**이다. 율법은 신자의 손에서도 죄를 자극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셋째 용도를 말하는 자는 갈라디아서의 경고를 한순간도 잊을 수 없다.

>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 — 갈라디아서 3:1-3

성령으로 시작한 신자가 셋째 용도를 **동력**으로 착각하는 순간, 다시 육체로 마치게 된다. 이것이 로이드존스의 진단이다. 한국 교회의 풍경이 이 진단을 그대로 비춘다. 주일 출석 점수표, 헌금 통계, QT 일수 자랑, 새벽기도 횟수가 모두 측정 가능한 **영적 성과**로 변질되어 있다. 이름은 거룩한 습관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이 나를 받으시리라"는 행위 의지가 다시 부활한다. 셋째 용도라는 이름을 입었을 뿐, 실체는 첫 번째 갈라디아다.

## 바빙크 — 두 강조점은 한 진리의 두 면이다

바빙크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지 않는다. 둘 다 옳다고 본다. 그가 「개혁교의학」에서 정리한 길은 **내용과 기능을 구분**하는 것이다. **율법의 내용은** 영원한 거룩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므로 폐기될 수 없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은** 새 언약 안에서 변형된다. 같은 율법이 옛 언약 아래서는 **저주의 칼**이었으나, 새 언약 아래서는 **길의 등불**이 된다.

이 변형을 지탱하는 것이 **동력의 차이**다. 두려움이 동력이면 시내산이 다시 서고, 감사가 동력이면 시온산의 빛이 임한다. 같은 십계명이 한 사람에게는 법전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버지의 편지다. 차이는 책에 있지 않고 읽는 자의 가슴에 있다.

>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
> — 갈라디아서 3:24-25

여기서 **초등교사**(παιδαγωγός)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역할이 변형된다. 어린아이를 학교로 끌고 가던 종이, 이제는 같은 길을 함께 걷는 친구가 된다. 길은 같다. 동행자의 자리가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신자가 그 길을 즐거워할 수 있게 된다.

>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 로마서 7:22

율법을 즐거워할 수 있는 자만이 율법을 안내자로 둘 수 있다. 율법을 여전히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같은 율법이 다시 멍에가 된다.

## 분기점 — 율법을 볼 때 무엇을 보는가

세 사람의 강조점은 한 분기점에서 갈라지고 다시 만난다. 신자가 율법을 펼칠 때 그 너머로 **그리스도를** 보는가, 아니면 **율법 자체**를 보는가. 그리스도를 보는 자에게 셋째 용도는 자유의 길이 된다. 율법 자체를 보며 점수를 세기 시작하는 자에게는 같은 셋째 용도가 새 멍에로 변한다. 칼뱅은 첫 번째 가능성을 변호했고, 로이드존스는 두 번째 위험을 경계했고, 바빙크는 둘 다 같은 동력의 문제임을 보여 주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86문이 이 통합을 가장 단정하게 표현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모든 비참에서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까." 답은 이렇다. "우리의 모든 삶 전체로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윤리의 중심에 있는 **감사의 윤리**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감사해서, 점수를 따려고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응답하려고. 같은 십계명이 같은 손에 들려도 동력이 바뀌면 다른 책이 된다.

## 한국 교회의 두 절벽

이 균형이 무너질 때 한국 교회는 익숙한 두 절벽 사이를 오간다. 한쪽에서는 반율법주의의 값싼 은혜가 흐른다. "은혜 시대에 율법은 끝났다"는 가벼운 설교가 신자의 거룩의 추구를 마비시킨다. 다른 쪽에서는 율법주의의 새 멍에가 자란다. 측정 가능한 종교 행위들이 신앙의 점수표가 되어 신자의 양심을 짓누른다. 두 절벽은 정반대를 향하지만 뿌리는 같다. **둘 다 셋째 용도의 정당한 자리를 잃었다.** 한쪽은 율법을 폐기해 안내자를 잃었고, 다른 쪽은 율법을 동력의 자리로 끌어올려 안내자를 다시 주인으로 만들었다.

## 지도와 연료

가장 단순한 비유로 정리하면 이렇다. **율법은 지도이지 연료가 아니다.** 연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 고린도후서 5:14

지도가 없으면 신자는 길을 잃는다. 셋째 용도를 부정하는 반율법주의의 결과다. 연료가 잘못되면 신자는 같은 길 위에서 다시 노예의 자리로 돌아간다. 셋째 용도를 동력으로 오용하는 율법주의의 결과다. 칼뱅은 지도의 필요성을, 로이드존스는 연료의 정체성을, 바빙크는 둘이 함께 가야 하는 이유를 가르쳤다.

## 신자의 손에 들린 십계명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회심한 후 십계명을 다시 책상 앞에 붙여도 되는가. 답은 분명하다. 붙여도 된다. 다만 그것을 **법전**으로 붙이지 말고 **아버지의 편지**로 붙이라. 같은 종이, 같은 글자, 같은 명령이지만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다시 시내산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시온산의 빛이다. 차이는 종이에 있지 않고 가슴에 있다.

셋째 용도는 자유인가 멍에인가. 답은 양쪽 모두다 — **어떤 동력 위에 서 있는가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슴을 강권할 때 셋째 용도는 신자의 자유의 노래가 되고, 자기 의가 다시 일어설 때 같은 셋째 용도는 자유 위에 얹는 새 멍에가 된다. 개혁주의 신학이 우리에게 주는 결론은 율법을 더 많이 가르치라는 것도, 덜 가르치라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동력으로 두고 율법을 길의 등불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제야 신자의 손에 들린 십계명은 무거운 책이 아니라 사랑하는 분이 보내신 편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