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용어 사전 4부: 한국 교회에서만 쓰는 말들

> 사모님, 권사님, 새벽기도, 부흥회, 전도, 심방 — 세계 어디서도 통하지 않는 한국 교회 고유의 언어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새신자, 교회용어, 한국교회, 직분, 새벽기도, 부흥회, 전도
- 게시일: 2026-07-20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newcomer-church-terms-4/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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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만의 언어

1부에서는 하나님을 말하는 단어들을, 2부에서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일을 담은 단어들을, 3부에서는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말들을 살펴보았다. 이 단어들은 어렵지만 성경에 뿌리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는 성경에도 없고, 세계 어디에서도 통하지 않는 말들이 있다. 사모님, 권사님, 새벽기도, 부흥회, 전도, 심방. 이 말들은 한국 교회 밖으로 나가면 번역조차 되지 않는다. 영어로 옮길 단어가 없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면, 한국 교회가 왜 이런 모습인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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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모님 — 성경이 주지 않은 짐

한국 교회에서 목사의 아내를 '사모님'이라 부른다. 존경을 담은 호칭이라고 하지만, 이 호칭 뒤에는 보이지 않는 직분이 따라온다. 사모님은 주일학교를 돌봐야 하고, 식사 준비를 챙겨야 하고, 새가족을 맞이해야 하고, 언제나 웃어야 한다. 교인들의 기대 속에 사모님은 사실상 무보수 부교역자가 된다.

그러나 성경은 목사의 아내에게 아무런 직분도 부여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한 것은 이것뿐이다.

>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 — 디모데전서 3:2

감독(목사)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 이것이 성경이 목사의 결혼에 대해 말하는 전부다. '사모님'이라는 호칭은 유교적 사제 관계에서 온 한국 고유의 창작이다. 스승의 아내가 곧 스승이라는 전통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목사의 아내는 교회의 한 지체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다. 성경이 주지 않은 짐을 지우는 것은 존경이 아니라 억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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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사, 집사, 장로 — 섬김이 계급이 되었다

한국 교회에서 직분은 계단이다. 집사 → 안수집사 → 권사 → 장로. 마치 승진처럼, 신앙 연수와 헌금 실적과 출석률이 기준이 된다. 장로가 되면 당회에 참석하고, 권사가 되면 기도 모임을 이끈다. 직분이 올라갈수록 교회 안에서의 발언권이 커진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직분의 구조는 이와 다르다. 신약에는 두 가지 직분이 있다. 장로(**프레스뷰테로스**, **πρεσβύτερος**)와 집사(**디아코노스**, **διάκονος**).

장로는 감독과 같은 직분이다.

>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 — 디모데전서 5:17

집사는 문자 그대로 '섬기는 자'다. 사도행전에서 일곱 사람이 세워진 것이 그 기원이다.

>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 — 사도행전 6:3

그런데 권사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한국 교회가 만든 직분이다. '권사'(**勸士**)라는 명칭 자체가 '권면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한자어로, 한국 장로교 전통에서 여성에게 장로직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만든 대안이었다.

문제는 직분 자체가 아니라, 직분이 섬김에서 계급으로 바뀐 것이다. 세상의 조직에서 직급이 올라가면 권한이 커지듯, 교회에서도 직분이 올라가면 목소리가 커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 — 마태복음 20:26

직분의 기준은 연차가 아니라 섬김이다.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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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기도 — 은혜의 유산이 율법이 될 때

한국 교회의 가장 독특한 전통 중 하나가 새벽기도회다. 새벽 5시, 아직 어두운 시간에 교회에 모여 찬송하고 기도한다. 전 세계 어디에도 이런 전통은 없다. 한국 교회만의 것이다.

그 기원은 1907년 평양 대부흥이다. 나라를 잃어가던 시대, 사람들이 새벽에 모여 울며 기도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새벽이 유일하게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감시의 눈을 피해,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나갔다. 새벽기도는 저항이었고 생존이었다.

예수님도 새벽에 기도하셨다.

>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 — 마가복음 1:35

시편 기자도 노래한다.

>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 — 시편 5:3

새벽에 기도하는 것 자체는 아름다운 경건의 훈련이다. 그러나 이것이 율법이 되는 순간이 있다. "새벽기도를 빠지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시선, "나는 365일 새벽기도를 했다"는 자부심, 새벽기도 출석 자체가 신앙의 척도가 되는 분위기. 그때 은혜의 유산은 행위의 사슬이 된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지, 출석부에 도장을 찍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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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흥회 — 감정 이벤트가 된 영적 각성

한국 교회에서 부흥회라 하면, 외부 강사를 초청해 며칠간 집회를 여는 것을 떠올린다. 뜨거운 설교, 눈물, 방언, 회개의 울음, 그리고 헌금. 감정의 온도가 높을수록 "은혜가 컸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흥(**revival**)의 원래 의미는 이것이 아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다.

>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 — 시편 85:6

부흥이란 죽어가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18세기 대각성 운동 때,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부흥의 표지를 제시했다 — 겸손, 죄에 대한 각성, 그리스도 중심성. 감정이 터지는 것이 부흥의 증거가 아니라, 삶이 바뀌는 것이 증거였다.

문제는 찰스 피니 이후 부흥이 '기술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적절한 분위기, 적절한 음악, 적절한 강사 — 이 조합을 맞추면 부흥이 일어난다는 생각이 퍼졌다. 이사야의 경고가 여기에 해당한다.

>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 — 이사야 29:13

눈물이 나면 회개한 것일까? 감정이 뜨거우면 믿음이 깊은 것일까? 부흥은 감정의 온도가 아니라,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사건이다. 이것은 기술로 만들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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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 — 숫자가 아니라 소식이다

"전도 나가자!" 한국 교회에서 전도는 거의 캠페인이다. 전도 주간, 전도 폭발, 전도 팀. 누가 몇 명을 데려왔는지가 보고된다. 교회 성장의 핵심 전략으로, 전도는 숫자 채우기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전도의 원어 **에우앙겔리조**(**εὐαγγελίζω**)는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뜻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달려와 왕에게 알리는 전령의 행위다. 전령은 승리를 만들지 않는다 — 이미 일어난 승리를 전할 뿐이다.

>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 로마서 10:14

전도의 주도권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에게 있다. 빌립은 광야 길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났다. 우연이 아니었다.

>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 — 사도행전 8:29

성령이 보내셨다. 빌립은 따라갔을 뿐이다.

전도는 설득이 아니라 선포다. 목표는 회심자 수가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좋은 소식이 좋은 소식답게 전해지려면, 전하는 사람의 삶이 그 소식을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 말로 복음을 전하면서 삶으로 복음을 부정하면, 그것은 전도가 아니라 광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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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방 — 목자가 양을 찾아가는 것

심방(**尋訪**)은 '찾아서 방문한다'는 뜻이다. 한국 교회에서 심방이라 하면, 목사가 교인의 가정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기도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 전통 자체는 아름답다. 목자가 양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 — 에스겔 34:12

예수님이 바로 그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삭개오를 찾아가셨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들어가셨고, 병든 베드로의 장모를 찾아가셨다.

심방의 방향은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목자에게서 양에게로다. 문제는 심방이 형식이 될 때 생긴다. 목사가 오신다고 집을 치우고, 음식을 준비하고, 헌금 봉투를 마련하는 것 — 이것은 양이 목자를 접대하는 것이다. 방향이 뒤집어진 것이다.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 — 야고보서 1:27

심방의 핵심은 형식이 아니라 방향이다. 누가 누구를 찾아가느냐.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건강한 자가 아픈 자를,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심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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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아니라 말씀 위에 서는 것

4부에 걸쳐 스무 개의 단어를 살펴보았다. 은혜, 영광, 거룩, 섭리, 회개, 칭의, 성화, 구원, 영접, 아멘, 할렐루야, 간증, 은혜받다, QT, 그리고 사모님, 권사, 새벽기도, 부흥회, 전도, 심방.

어떤 단어는 성경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고, 어떤 단어는 교회 전통 속에서 의미가 변질되었고, 어떤 단어는 처음부터 성경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리즈의 목적은 용어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쓰는 말이 우리의 믿음을 만든다. "은혜받았다"가 감동의 동의어가 되면, 감동이 없는 날 우리의 믿음은 흔들린다. "부흥"이 감정 이벤트가 되면, 조용한 회개는 부흥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단어가 변질되면 신앙이 변질된다.

그래서 단어를 바로잡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다. 사람들이 만든 말 위에 서면 사람들이 만든 신앙을 갖게 된다. 말씀 위에 서면 말씀이 가리키는 분 앞에 서게 된다.

교회에서 들리는 모든 말에 이렇게 물어보라 — "이것은 성경이 하는 말인가, 사람이 만든 말인가?" 그 질문 하나가 신앙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