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 율법은 오늘도 유효한가 — 도덕법·시민법·의식법과 율법의 3중 용법

> 레위기의 제사 규례는 왜 지키지 않으면서 십계명은 지키는가. 개혁주의 전통이 오랫동안 답해온 율법의 세 구분과 세 가지 용법을 따라간다.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신학, 율법, 웨스트민스터, 개혁주의
- 게시일: 2026-09-13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law-three-uses/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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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신자의 당혹감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로 결심한 어느 성도가 레위기 11장에서 걸음을 멈춘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새우를 먹지 말라, 두 종류의 실로 짠 옷을 입지 말라. 그는 당혹스럽다. 주일 점심의 돈가스는 범죄인가. 한편 옆 장을 넘기면 "살인하지 말라"가 나온다. 이것은 분명히 오늘도 유효하다. 같은 모세오경 안에 있는 두 명령이 어떻게 한쪽은 폐기되고 한쪽은 영속되는가.

이 당혹감이 정직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신자는 두 극단 중 하나로 밀려간다. 한쪽 끝에서는 **율법주의**가, 다른 쪽 끝에서는 **반율법주의**가 그를 기다린다. 한국 교회 안에도 이 두 절벽은 늘 가까이 있다. "모세의 절기를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신흥 집단이 있는가 하면, "은혜 시대에는 율법이 모두 끝났다"며 십계명의 권위까지 느슨하게 푸는 설교도 적지 않다. 두 오류는 정반대 방향을 향하지만 뿌리는 같다. **구약 율법의 내적 구조를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 한 율법, 세 층위

종교개혁이 재발견한 것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고대 교회가 이미 알고 있던 통찰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미 체계화했고, 칼뱅은 「기독교 강요」 2권 7~8장에서 이를 개혁주의의 공식 유산으로 정돈했다(4권 20장은 이 율법의 시민적 함의를 별도로 전개한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하나지만,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세 층위가 공존한다.

**도덕법**(lex moralis)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자체를 반영한다. 십계명이 그 요약이며, 그 핵심은 창조 시에 이미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었다. **시민법**(lex civilis 또는 judicialis)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신정 국가의 사회 질서를 규정한 법이다. 소가 사람을 받았을 때의 배상 규정, 도피성 제도, 토지 희년 등이 여기 속한다. **의식법**(lex ceremonialis)은 성막과 제사, 절기와 정결 규례처럼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하는 그림자였다.

이 세 구분은 임의의 분류가 아니다. 성경 자체가 기능상의 구별을 증언한다. 예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고 하실 때, 그분은 도덕적 안식 원리와 의식적 형식을 구별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더 분명하게 말한다.

>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
>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
> — 히브리서 10:1, 14

제사와 정결 규례는 본래 그림자였고,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면서 **폐지가 아니라 성취**로 흡수되었다. 돼지고기 금지가 오늘 구속력이 없는 것은 이 규정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규정이 가리키던 **거룩하신 하나님과 부정한 인간의 분리**라는 실체가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환상에서 하늘이 내린 음식 보자기(행 10장)는 이 성취의 극적 선언이었다.

시민법 역시 단순히 유효하거나 무효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신정 국가였던 동안 그 법조문은 그대로 효력을 가졌지만, 신약 교회는 이미 열방에 흩어진 순례 공동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문제를 섬세하게 정리한다.

> 하나님은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사법적 법을 주셨으나, 그 국가와 함께 소멸되었고 이제 다른 나라들에게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의무지우지 않는다. **다만 그 법들이 담고 있는 일반적 형평**(general equity)**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
>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장 4항

조문 자체는 이스라엘과 함께 끝났으나, 그 법이 담고 있는 **형평과 정의의 원리**는 오늘도 살아 있다. "네 지붕에 난간을 만들라"(신 22:8)는 조문을 문자 그대로 한국의 아파트 옥상에 적용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명령이 품은 **이웃 생명에 대한 책임의 원리**는 건축법과 공공 안전에 대한 신자의 윤리 의식으로 지금도 구속력을 가진다.

## 영속하는 도덕법 — 왜 십계명은 남는가

그렇다면 도덕법만은 왜 폐기되지 않는가. 바빙크는 이에 대해 신학적으로 가장 단단한 답을 제시했다. 도덕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의 표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민법은 한 민족의 상황에 묶여 있었고, 의식법은 한 구속사적 시기의 그림자였지만, 도덕법은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반영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를 그치지 않으시는 한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도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율법을 느슨하게 풀어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차원까지 더 엄격하게 심화**시키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
>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 — 마태복음 5:17-18

바울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고 외칠 때, 그가 굳게 세운 것이 바로 이 영속하는 도덕법이다.

## 율법의 세 가지 용법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도덕법이 영속한다고 해서 신자와 불신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2권 7장에서 도덕법이 **세 가지 용법**(usus)을 가진다고 정리했다. 이 구분을 알지 못하면 율법 이야기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첫째 용법 — 거울**(usus elenchticus). 율법은 우리의 죄를 비추는 거울이다. 산상수훈의 거울 앞에 서면 누구도 무죄를 주장할 수 없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이 용법이 없으면 복음은 값싸진다. 병을 진단받지 않은 환자에게 치료약은 사치품일 뿐이다.

**둘째 용법 — 고삐**(usus politicus). 율법은 타락한 사회에서 악의 질주를 억제하는 고삐다. 불신자 공동체에서도 살인과 절도가 금지되고 처벌되는 이유는, 도덕법의 요구가 양심과 사회 제도 속에서 일반 은총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용법이 없으면 세상은 지탱되지 않는다.

**셋째 용법 — 안내자**(usus didacticus 또는 tertius usus). 그리고 이것이 개혁주의가 루터파와 가장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이다. 중생한 신자에게 율법은 **정죄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안내자**로 다시 주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를 받은 자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지만,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이제 율법을 **아버지의 뜻이 담긴 지도**로 기쁘게 읽는다. 다윗이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라고 고백한 자리가 바로 이 셋째 용법의 자리다.

## 두 절벽 사이에서

이제 서두의 두 극단이 왜 모두 오답인지 분명해진다.

"모세의 절기를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의식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오류다. 그림자를 붙잡으려다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놓친다. 갈라디아서가 이미 한 번 싸워 이긴 싸움을 다시 꺼내는 셈이다. 반대로 "은혜 시대에는 율법이 모두 끝났다"는 주장은 **영속하는 도덕법과 셋째 용법의 자리를 지워버린** 오류다. 값없는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킨다. 본회퍼가 경고한 바로 그 함정이다.

한국 교회 강단이 붙들어야 할 길은 그 사이의 좁은 오솔길이다. 강대상에서 레위기의 제사 규정을 풀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향한 성취로 가리켜야 하며, 십계명을 풀 때는 정죄의 망치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순종하는 아들의 기쁨**으로 강해해야 한다. 시민법의 한 조문을 오늘의 윤리에 옮길 때는 문자가 아니라 그 안의 형평을 길어 올려야 한다.

## 다 이루신 분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외치셨을 때, 그분은 의식법의 모든 제사를 당신의 한 번의 제사로 삼키셨고, 도덕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한 순종으로 완성하셨다. 신자는 더 이상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해방 때문에, 신자는 이제 율법을 **감사의 문법으로** 새로 읽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새 언약의 약속을 이렇게 기록했다.

> **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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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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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브리서 8:10, 12

용서받은 마음의 안쪽에 새겨진 법. 그 법은 더 이상 돌판 위의 정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아는 자녀의 기쁜 규칙이다. 오늘 성경을 펼쳐 레위기를 만난 그 성도는, 이제 두려움이 아니라 경이로 그 페이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림자는 실체를 잃은 적이 없고, 거울은 자녀를 비추기를 그친 적이 없다.** 다만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복음 안에서 완전히 달라졌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