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형상과 생명윤리 1부: 형상은 기능이 아니라 존재다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형상으로 지어졌느냐에 달려 있다 — Imago Dei가 생명윤리의 토대가 되는 이유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생명윤리, 하나님의형상, 개혁주의윤리, 인간론
- 게시일: 2023-07-11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imago-dei-bioethics-1/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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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능을 잃은 인간은 덜 인간인가

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하자. 만약 인간의 가치가 이성, 자의식, 미래를 기획하는 능력에 있다면 — 그 능력을 갖추지 못한 태아는 아직 인간이 아닌가? 그 능력을 잃어버린 치매 노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가?

이 질문은 철학 교실의 사고실험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매일 내리는 결정의 바닥에 깔려 있는 전제다. OECD 최상위의 노인 자살률, 장애 자녀 출산 시 주변의 낙태 압박,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교회 안에서조차 흔들리는 목소리 — 이 모든 것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의 물음에 닿는다.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시리즈는 그 물음에 대한 성경적 답을 찾는다. 1부에서는 토대를 놓겠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생명윤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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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상은 부여된 것이지, 성취된 것이 아니다

>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 창세기 1:26-27

성경이 인간에 대해 말하는 첫 번째 사실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지어졌는가**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 이 선언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선언이다. 형상은 인간이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신학적 분기점이 생긴다.

**기능적 해석**은 형상을 이성, 도덕 판단력, 자의식,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으로 본다. 이 해석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기능은 발달되지 않을 수 있고, 손상될 수 있고,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결론에 도달한다 — 고도의 인지 기능을 가진 침팬지가 중증 장애 신생아보다 더 큰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는 주장. 기능 중심의 인간관은 결국 기능을 상실한 인간의 존엄을 설명하지 못한다.

**존재론적 해석**은 다르다. 형상은 인간에게 덧붙여진 어떤 속성(accidens)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구성 원리다.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이를 정확히 짚었다. 형상은 인간의 본질(esse) 자체에 속하며, 인간이 인간인 한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선언하신 그 순간, 형상은 인간 존재의 정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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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은 형상을 훼손했으나, 소멸시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타락 이후에는 어떤가? 죄가 형상을 파괴하지 않았는가?

개혁주의 신학은 여기서 정밀한 구분을 한다. 광의의 형상(imago Dei in sensu lato) —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근본적 사실 — 은 타락 이후에도 보존된다. 협의의 형상(in sensu stricto) — 참된 지식, 의, 거룩함 — 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러나 손상은 소멸이 아니다.

이 구분이 공허한 학문적 유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본문이 있다. 창세기 9장은 홍수 이후, 타락한 인류를 향한 말씀이다.

>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 — 창세기 9:6

주목하라. 살인이 금지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피해자의 지능도, 사회적 기여도, 자의식의 수준도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그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 범죄자와 피해자가 모두 죄인인 세계에서도, 하나님은 형상을 근거로 생명의 불가침성을 선언하신다.

야고보서는 이것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 — 야고보서 3:9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형상은 신앙의 유무와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존재론적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에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혀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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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동전은 진흙 속에서도 왕의 것이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께서 데나리온 동전을 들어 물으셨다.

>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 — 마태복음 22:20

동전에 새겨진 가이사의 형상은 동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동전이 낡든, 흠집이 나든, 진흙에 뒤덮이든 — 형상이 새겨져 있는 한 그것은 가이사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인간에게 새겨진 형상은 그가 **누구의 것인지**를 말해준다. 죄로 더럽혀졌어도, 기능이 손상되었어도, 세상이 무가치하다고 판정해도 — 형상이 새겨져 있는 한 그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형상에는 등급이 없다. 건강한 청년의 형상이 치매 노인의 형상보다 더 선명한 것이 아니다. 대학 교수의 형상이 중증 장애인의 형상보다 더 완전한 것이 아니다. 형상은 이진법이다 — 있거나, 없거나. 그리고 인간인 한, 그것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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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 — 형상의 원형이자 회복의 길

그런데 이 형상은 처음부터 한 분을 향해 있었다.

>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 — 골로새서 1:15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 로마서 8:29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형상의 원형(archetypum)이시다. 타락이 형상을 훼손했다면, 구원은 형상의 회복이다.

>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 — 골로새서 3:10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겁다. 형상을 짓밟는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회복하시려는 바로 그 형상을 인간이 기능의 잣대로 등급 매기고 폐기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윤리적 실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다.

>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 마태복음 25:40

"지극히 작은 자"는 기능의 척도로는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존재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존재에게 한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형상의 존재론적 토대가 없다면, 이 말씀은 감상적 수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형상이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 인간 존재 자체에 새겨진 것이라면,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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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여기까지가 토대다. 형상은 기능이 아니라 존재다. 부여된 것이지 성취된 것이 아니다. 타락으로 훼손되었으나 소멸되지 않았다. 등급이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을 향해 나아간다.

이 원리가 참이라면 — 그리고 성경은 이것이 참이라고 선언한다면 — 이 원리는 예외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장 마주하기 불편한 생명에게도, 우리 사회가 가장 외면하고 싶어하는 존재에게도.

그런데 원리를 선언하는 것과 그 원리를 가장 뜨거운 논쟁의 한가운데에서 관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형상은 존재에 속한다"는 명제가 진정으로 시험받는 자리가 있다 — 아직 숨을 쉬지 않는 생명, 아직 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생명 앞에서. 그 자리에서 이 원리가 무너진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원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