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왜 이렇게 망가졌는가 1부 — 하나님의 형상, 인간이라는 존재의 원본

> 망가진 느낌의 정체를 찾아가는 여정 — 인간은 왜 존엄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인간론, 하나님의형상, 타락, 성화
- 게시일: 2024-04-01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imago-dei-1/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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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나는 왜 이렇게 망가졌는가 —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타락 **(3부 중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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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느낌의 정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순간이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이 형편없게 느껴지는 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한 뒤 찾아오는 자기 혐오.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분노, 시기, 탐욕을 마주한 뒤의 공허함. 그때 우리는 중얼거린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흥미로운 것은, 이 질문 자체에 이미 단서가 숨어 있다는 점이다. 동물은 자기 상태를 한탄하지 않는다. 물고기는 헤엄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새는 더 높이 날지 못함을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 오직 인간만은 — 자신이 "어떤 상태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감각을 갖고 있다.

이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성경은 그 기원을 인류의 첫 페이지에 기록해 두었다.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 창세기 1:27

"하나님의 형상대로"(בְּצֶלֶם אֱלֹהִים, *betselem elohim*). 성경이 인간에 대해 처음 하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우연히 출현한 고등 동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 하나님을 닮도록 의도된 존재다. 그리고 바로 이 원본이 있기 때문에 — 우리가 그 원본에서 벗어났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에 — "나는 왜 이 모양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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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상이란 무엇인가 — 왕의 초상화가 아닌 왕의 대리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외모를 떠올린다. 하나님이 인간의 얼굴을 닮으셨다거나, 인간의 몸이 어떤 신적 원형을 본뜬 것이라는 식으로.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형상"(צֶלֶם, *tselem*)은 그런 뜻이 아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형상"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가졌다. 왕은 자기 제국의 변방에 자신의 형상(석상)을 세웠다. 그 형상은 왕의 외모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땅은 내 영역이다. 이 형상이 나를 대신하여 내 권위를 행사한다**"는 선언이었다. 형상은 곧 **대리 통치자**였다.

성경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를 때, 바로 이 의미가 작동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안에 세워진 **살아있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 위에서 대리하는 존재다. 그래서 형상 선언 직후에 곧바로 이런 명령이 이어진다.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 창세기 1:28

다스림(dominion)은 형상의 기능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돌보고, 가꾸도록 부름받았다. 이것은 특권만이 아니라 책임이다. 좋은 왕이 백성을 섬기듯, 형상을 지닌 인간은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방식으로 돌볼 사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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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상은 한 부분이 아니라 존재 전체다

형상을 이해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형상은 이성이다" 혹은 "형상은 도덕성이다"처럼 형상을 인간의 한 부분, 한 능력으로 국한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형상을 인간의 **특정 부분**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창세기 1:27은 "하나님이 사람의 이성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을" — 인간 전체를 —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정밀하게 포착했다. 형상은 인간이 **소유하는 것**(something a human *has*)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something a human *is*)이다.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이성만이 아니라 감정도,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도 — 인간 존재의 전체(totus homo)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은 왜 중요한가? 만약 형상이 이성이라면, 지적 장애인은 형상이 덜한 존재가 된다. 형상이 도덕적 능력이라면, 중증 치매 환자는 형상을 잃은 존재가 된다. 그러나 형상이 인간 존재 전체라면, 어떤 상태의 인간이든 — 태아이든, 노인이든, 장애인이든 —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엄한 존재다. 인권의 가장 깊은 뿌리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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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상의 세 차원 — 존재, 도덕, 기능

형상이 인간 전체에 해당한다고 해서,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형상의 내용을 크게 세 차원으로 구분해 왔다.

**첫째, 존재론적 차원이다.** 인간은 이성, 양심, 의지, 감정을 가진 인격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단하고,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 이후에도 완전히 잃지 않은 것이다 — 불의한 사람도 생각하고, 무신론자도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 사회가, 문화가, 학문이, 예술이 가능하다.

**둘째, 도덕적 차원이다.** 최초의 인간은 단지 생각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 안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 에베소서 4:24

>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 — 골로새서 3:10

이 구절들이 회복의 방향을 "의와 거룩"과 "지식"으로 제시한다는 것은, 타락 이전 인간이 바로 그 의와 거룩과 지식 안에 있었음을 함축한다.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은 "원의"(原義, original righteousness)라 부른다.

**셋째, 기능적 차원이다.** 인간은 왕으로서 다스리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세계를 봉헌하며,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았다. 창조 명령(cultural mandate)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봉사와 영광**의 사명이다.

이 세 차원이 조화를 이룬 것이 인간의 원래 모습이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지식), 하나님 앞에 의로우며(도덕),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계를 돌보는(기능) 존재. 이것이 인간 설계의 원본 도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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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의 비유 — 하나님을 향할 때만 참된 형상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이 있다. 형상은 자기 안에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온전히 작동**한다는 것이다.

칼뱅(Jean Calvin)은 인간을 **거울**(speculum)에 비유했다. 거울은 빛의 근원을 향할 때만 빛을 반사한다. 거울 자체에 빛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형상은 하나님을 향할 때만 —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즐거워할 때만 — 참된 형상으로 빛난다.

이것은 인간 이해에 대한 혁명적 선언이다. 현대 문화는 "진정한 나"를 내면에서 찾으라고 말한다. 자기 안의 잠재력, 자기 안의 욕구, 자기 안의 고유성을 발견하면 비로소 "진짜 나"를 찾게 될 거라고.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기독교 강요**의 첫 문장이 바로 이것이다.

>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먼저인지 규정하기 어렵다.**"
> — 칼뱅, **기독교 강요** I.1.1

하나님을 모르면 나를 모른다. 나를 진정으로 알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형상은 관계적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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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까지 형상이다 — 꿀을 아는 것과 맛보는 것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형상을 이성과 의지로만 이해하면, 인간 경험의 절반을 놓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감정의 차원**이 포함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단지 **지적으로 인식**하도록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영광을 **맛보고, 느끼고, 기뻐하고, 감동받도록** 만들어졌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이 차이를 "꿀이 달다는 것을 아는 것"과 "꿀의 단맛을 실제로 혀로 맛보는 것"의 차이에 비유했다. 전자는 지식이고, 후자는 **감각**(sense)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주어졌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이 끌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감격하며,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경외와 기쁨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 — 이것이 형상의 작동 방식이다. 인간의 감정(affection)은 실수가 아니다. 감정은 하나님을 향해 설계된 안테나다.

이 점을 놓치면, 신앙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되고, 교리는 차가운 명제의 나열이 되며, 예배는 의무적 참석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온 존재로 —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통합하여 — 하나님을 향해 반응하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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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족의 폐허 — 그리고 질문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원본 도면**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세계를 돌보는 존재. 존재 전체가 형상이며, 그 형상은 하나님을 향한 관계 안에서 빛나도록 설계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도면을 보면 볼수록,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과 맞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해 설계된 감정은 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앉아 있고, 의와 거룩은 고사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양심을 거스르며, 세계를 돌보는 대리 통치자는커녕 세계를 착취하고 파괴하는 데 익숙하다.

왕의 궁전이었던 곳에 서 있지만, 지붕은 무너지고 벽은 갈라졌다. 벽에 걸린 초상화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퇴색했다. 왕관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 아직 왕관임은 알 수 있지만, 그 영광은 상실되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원래부터 그랬다. 인간은 본래 이런 존재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노력하면 다시 올라갈 수 있다. 교육과 의지와 자기 계발이면 충분하다."

성경은 이 두 대답 모두 거부한다. 인간은 원래 이런 존재가 아니었다 — 그래서 "나는 왜 이 모양인가"라는 질문이 존재한다. 그리고 노력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왜 그런지는 다음 이야기에서 밝혀진다.

**그러나 먼저 이것만은 분명히 해 두자. 당신이 느끼는 그 "망가진 느낌"은, 당신이 본래 망가진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의 원본이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에, 지금의 상태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깨진 것을 아파하는 그 감각 자체가, 당신 안에 아직 형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 고귀한 원본은 어떻게, 왜, 얼마나 깊이 손상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