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한 하나님이 왜 아이들의 고통을 허용하는가

> 신정론의 가장 날카로운 물음 앞에서, 논리가 아닌 십자가로 응답하다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변증, 신정론, 고통, 악의문제, 십자가
- 게시일: 2026-08-20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evil-suffering-children/
- 컬렉션: blog

---

## 두 청중에게 쓰는 편지

이 글을 쓰기 전에 잠시 멈춘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두 사람이 던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서재에 있다. 책상 위에 도킨스와 흄이 펼쳐져 있고, 커피는 식었다. 그는 논리의 정합성을 따진다. 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무고한 아이가 고통받는가. 이 물음은 그에게 지적 퍼즐이다.

다른 한 사람은 병원 복도에 있다. 작은 손의 온기가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고, 간호사가 건넨 종이컵의 커피는 식었다. 그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이유를 물을 기력조차 없다.

이 두 사람에게 같은 언어로 대답하는 것은 실패한다. 서재의 청중에게는 엄밀함이, 복도의 청중에게는 임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응답은 결국 하나의 장소에서 만난다. 십자가다.

## 무신론의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

먼저 서재의 청중에게 말한다.

악의 문제가 무신론의 가장 강력한 무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무기가 무신론자 자신의 손을 벤다. 아이의 고통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려면, 그 선언이 기대고 있는 도덕적 지평이 실재해야 한다. 그러나 맹목적 우주에서 진화한 신경 발화가 "이것은 부당하다"고 판결할 자격을 어디에서 얻는가. 분자의 춤에는 정의가 없다.

무신론자가 아이의 고통 앞에서 분노할 때, 그 분노 자체가 그의 세계관을 배반한다. 분노는 "이 세계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전제한다. 그 전제는 이 세계 바깥에 있는 선의 실재를 이미 빌려 쓰고 있다. 악의 문제는 하나님 없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제기조차 되지 않는다.**

## 전통 신정론의 한계

그러나 서재의 청중에게도, 병원 복도의 청중에게도, 우리는 값싼 대답을 건넬 수 없다.

자유의지 변호는 유아의 고통 앞에서 무너진다. 아이는 아직 의지를 행사한 적이 없다. 영혼-만들기 변호는 신생아의 고통이 누구의 성품을 단련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믿음이 부족해서", "숨겨진 죄 때문에"라고 말하는 번영 신학의 언어는 욥의 친구들의 언어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책망하신 신학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가장 정직한 출발점은 **타락의 우주적 파급**이다.

>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
> — 로마서 8:20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피조세계 전체에 죽음과 고통을 들여왔다. 갓난아이의 고통조차 이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다. "불공정하지 않은가"라는 항변은 정당하다. 그러나 같은 유기적 연대성이 구원에서도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연대성은 저주의 통로일 뿐 아니라 은혜의 통로이기도 하다. 한 사람 안에서 무너진 것을, 한 사람 안에서 되살리시는 것이 복음의 문법이다.

## 그러나 설명은 위로하지 못한다

여기까지가 신학의 정돈된 논의다. 그러나 병원 복도의 부모에게 이 논증을 던지는 것은 잔인함이다. 정합성은 슬픔을 덮지 못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설명이 아니라 한 사람을 내민다.

욥기 전체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끝까지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신다. 대신 나타나신다.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 욥은 해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났다. 성경은 고통의 문제를 **논리로 닫지 않고, 얼굴로 연다.**

그 얼굴이 결국 나사렛에서 나타난다.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
> — 요한복음 11:35

우주의 창조자가, 죽은 자를 살리실 능력이 있는 분이, 무덤 앞에서 우셨다. 무력해서가 아니다. 고통이 얼마나 실제적인 상실인지 아시기에 우셨다. 하나님은 고통을 바깥에서 설명하시지 않고, 고통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
> — 이사야 53:4-5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악의 문제에 논리로 답하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응답하셨다.**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우신 그분이, 바로 당신의 아이가 고통받던 그 침대 곁에 계셨던 분이다. 그분도 울고 계셨다.

## 아이들에 대한 소망

다윗은 갓난아이를 잃고 이렇게 말했다.

>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
> — 사무엘하 12:23

이것은 절망이 아니다. 소망의 문장이다. 다윗은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
> — 마태복음 19:14

그리스도의 팔은 신학자의 분류보다 넓다. 언약 안에서 태어나 스스로 신앙을 고백할 시간을 얻지 못하고 떠난 아이들에 대하여, 도르트 신경은 "경건한 부모가 그들의 자녀가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에 속해 있음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달콤한 감상이 아니라 언약의 논리다.

## 그리고 종착점

이 모든 것의 끝은 새 창조다.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 — 요한계시록 21:4

이 구절의 동사는 "닦는다"이다. 설명한다가 아니다. 눈물의 이유를 연설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신다.** 신정론의 마지막 답은 논증이 아니라 그 손길이다.

## 오늘, 두 청중에게

서재의 청중에게 말한다. 악의 문제가 하나님 존재를 반박한다고 생각했다면, 그 문제가 실은 하나님 없이는 제기조차 되지 않음을 보라. 그리고 그 문제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우주의 주변에서 설명문을 내려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와 아들을 고통 밖에 두지 않으신 분임을 보라.

병원 복도의 청중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왜에 답할 수 없다. 어떤 설교자도 5단계 해답을 건넬 수 없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안다. 당신의 눈물은 세어진다.

>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
> — 시편 56:8

하나님은 한 방울도 땅에 허비되도록 두지 않으신다. 이해하기 전에, 붙드십시오. 이해는 새 창조에서 온다. 붙드는 것은 오늘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