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D7: 20세기 복음주의 운동 — 빌리 그레이엄과 로잔 언약

> 1910년 *The Fundamentals* 5권에서 1974년 로잔 언약까지. 자유주의의 침식 후 복음주의는 어떻게 자기 좌표를 다시 찾았고, 빌리 그레이엄·존 스토트는 그 운동에 무엇을 남겼나.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교회사, 복음주의, 빌리그레이엄, 로잔언약
- 게시일: 202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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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church-history-evangelicalism/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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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블로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합니다. 이 글은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됐으며, 개혁주의적 견해는 글 하단 '개혁주의의 견해' 섹션에 별도 표기합니다.**

## 같은 단어, 다른 기억

한국 교회의 평균적인 50대에게 "복음주의"와 "부흥회"는 거의 같은 단어다.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닷새, 여의도 광장에 매일 110만 명이 모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2018)의 통역 설교를 들었다 — 한 도시 단위 집회로는 인류사 최대 규모였다고 *Christianity Today* 는 기록한다. 단상의 그림자는 작았고, 군중의 어깨는 끝없이 이어졌다. 한국 교회는 그날을 **복음주의의 절정** 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같은 단어가 21세기 한 청년에게는 다른 기억을 부른다 — 미국 대선 출구조사의 **백인 복음주의자**(white evangelical) 라는 표찰, 결단 손들기로 끝나는 수련회, 번영을 약속하는 강단. **복음주의**라는 단어 하나가 어떻게 "1910년 *The Fundamentals* 5권"과 "1974년 로잔 언약"과 "1973년 여의도"와 "21세기의 환멸"을 동시에 담을 수 있는가.

지난 편(D6)에서 우리는 19세기 선교 운동이 **부흥은 발이 자라난다**는 명제로 한 세기를 채운 것을 보았다. 그 한 세기의 끝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서구 교회의 척추를 침식했고, 20세기는 그 침식 위에서 복음주의가 자기 좌표를 다시 찾는 시대였다. 이 글은 그 좌표 작업의 이야기다.

## 역사적 배경 — 침식과 응답의 100년

### 자유주의의 그림자 (19세기 후반)

1860년대 이후 독일 자유주의 신학(슐라이어마허 → 리츨 → 하르낙)이 영어권 신학교를 점령해 갔다. 성경의 역사적 신뢰성을 의심하고, 동정녀 탄생·기적·육체적 부활을 비신화화하며, 기독교를 "**하나님의 부성과 인간의 형제애**" 라는 윤리 메시지로 환원했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 무류성 선언이 가톨릭의 응답이었다면, 개신교 안에서는 누가 응답할 것인가가 한 세대의 질문이었다.

### 1910 — 다섯 근본 교리

1910년부터 1915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의 두 평신도 사업가(라이먼·밀턴 스튜어트 형제)의 자비로 **『근본 교리(The Fundamentals)』** 12권(후에 4권으로 재편집)이 출간됐다. 90명의 보수 학자가 90편의 글을 기고했다. 이 책의 핵심에서 다섯 교리가 **근본**(fundamentals)으로 추출됐다.

1. 성경의 무오성
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3. 십자가의 대속
4.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5. 그리스도의 재림

이것이 **근본주의**(Fundamentalism) 의 출발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방어선** 이었다 — 자유주의가 다 양보해도 이 다섯은 양보할 수 없다.

### 1925 — 스코프스 재판과 후퇴

1925년 테네시 데이턴에서 한 고교 교사 존 스코프스가 진화론 강의로 기소됐다. 변호인 클래런스 대로우(자유사상가)와 검사 측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평신도 근본주의자)의 법정 공방이 라디오로 전국에 중계됐다. 법정에서는 근본주의가 **이겼다** — 스코프스는 유죄였다. 그러나 여론과 신문 만평에서는 근본주의가 **문화적 조롱거리** 가 됐다. 이후 근본주의는 사회·학계·문화의 주류에서 한 세대 동안 후퇴해 자기 학교·자기 출판사·자기 라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이 후퇴를 역사가 조지 마즈든은 "**위대한 역전**" 이라 부른다.

### 1942 — 신복음주의의 출범

1942년 보스턴에서 **전미복음주의협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가 창설됐다. 중심에는 두 인물 — 칼 헨리(Carl F. H. Henry)와 해럴드 오켄가(Harold Ockenga)가 있었다. 그들은 자유주의를 거부했다. 그러나 동시에 근본주의의 **반지성주의**와 **분리주의** 도 거부했다.

1947년 오켄가는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를 세웠다.

![풀러 신학교 페이튼 홀](/photos/fuller-seminary-pasadena.jpg)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풀러 신학교 페이튼 홀(Payton Hall). 1947년 해럴드 오켄가와 라디오 부흥사 찰스 풀러가 공동 설립한 이 학교는 신복음주의가 학문적 정밀성과 사회적 책임을 회복하는 거점이 됐다. 칼 헨리·에버렛 해리슨·조지 래드 같은 신학자들이 초기 교수진을 이뤘다. 출처: Bobak Ha'Eri, 2008, [Wikimedia Commons](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2008-1226-Pasadena-005-FullerTS.jpg), CC BY 3.0.** 같은 해 칼 헨리는 **『현대 근본주의의 불편한 양심(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 을 출간하며 **복음주의**가 사회로부터 도망친 자리에서 다시 사회로 들어와야 한다고 외쳤다. 1956년 그가 편집장이 되어 창간된 *Christianity Today* 가 이 새 운동의 잡지가 됐다. 사람들이 이를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 라 불렀다 — 사실상 오늘 우리가 **복음주의**(Evangelicalism) 라 부르는 그 운동의 본체다.

![빌리 그레이엄, 1966년](/photos/billy-graham-1966.jpg)
**빌리 그레이엄(1918-2018). 1966년 4월 11일 워싱턴 D.C.에서 워런 K. 레플러(Warren K. Leffler)가 촬영한 사진. 미국 **U.S. News & World Report** 지가 미 국회도서관에 기증할 때 모든 권리를 공공에 헌정했다. 출처: Warren K. Leffler / U.S. News & World Report, [Wikimedia Commons](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illy_Graham_bw_photo,_April_11,_1966.jpg), Public Domain.**

### 1949 — 빌리 그레이엄의 출범

1949년 가을, 31세의 한 침례교 부흥사가 LA 다운타운 공터에 천막을 치고 8주간 집회를 열었다. 그의 이름은 빌리 그레이엄. 신문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산하 신문사들에 "**이 사람을 띄워라(puff Graham)**" 라는 두 단어 메모를 보냈고, 한 도시 부흥회가 미 전역의 사건이 됐다. 이후 70년 동안 그는 약 185개국에서 직접 설교했고, 약 2억 1500만 명이 그의 집회에 직접 참석한 것으로 BGEA(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는 집계한다. 라디오·텔레비전 청취자까지 합치면 22억 명. 사도 바울 이후 한 사람이 직접 마주한 가장 많은 청중이었다.

### 1966·1974·1989·2010 — 세계가 모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자기 영향력이 커질수록 **세계 복음주의의 합의 형성** 을 자기 사명으로 보았다. 1966년 베를린 세계 전도 대회, 1974년 스위스 로잔의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1989년 마닐라 II, 2010년 케이프타운 III — 네 차례의 글로벌 대회가 열렸다.

이 중 1974년 로잔이 결정적이었다. 150개국에서 2,700명의 대표가 모였다. 영국 성공회의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가 기초 위원장을 맡아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 15조를 작성했다. 이 언약은 21세기까지 세계 복음주의의 합의 문서로 남아 있다.

### 1973년 5월·6월 — 여의도 광장

이 모든 흐름이 한국에 도착한 정점이 1973년 여의도였다. 닷새 동안 누적 약 320만 명, 마지막 날 110만 명. 통역은 김장환 목사였다. 그날 결단 카드를 작성한 사람이 약 7만 5천 명으로 집계된다. 이 한 차례의 집회가 한국 복음주의 교회 성장기의 상징이 됐고, 이후 1974년 엑스플로 74(여의도 광장 누적 650만 명)와 1980년 세계 복음화 대성회로 이어진다.

## 핵심 교리와 특징

### 베빙턴의 4축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이 1989년 정식화한 **복음주의의 네 축** 은 학계의 표준 정의가 됐다.

1. **성경 중심성**(Biblicism) — 성경의 최종 권위
2. **십자가 중심성**(Crucicentrism) — 그리스도의 대속의 중심성
3. **회심 중심성**(Conversionism) —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 돌이키는 결단
4. **활동 중심성**(Activism) — 전도와 사회 봉사로의 능동적 참여

이 네 축은 신앙고백서의 조항이 아니라 **운동의 DNA** 다. 이 네 축을 가진 한 사람은 장로교든 침례교든 감리교든 오순절이든 — 자기 교파를 유지한 채로 **복음주의자** 라는 이름을 함께 입는다. 복음주의가 **교파** 가 아니라 **운동**(movement) 인 이유가 여기 있다.

### 신복음주의의 차별점 — 사회로 다시 들어가다

근본주의가 1925년 이후 사회를 떠났다면, 신복음주의의 가장 큰 변화는 **사회로 다시 들어옴** 이었다. 칼 헨리의 1947년 책 한 권이 그 신호탄이었다. 사회 정의·시민권·기아·문맹·인종 화해 — 자유주의에 양보했던 영역을 복음주의는 다시 자기 일로 받아들였다.

이 흐름의 정점이 1974년 로잔 언약 5조다.

>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인간의 화해와 정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을 확언한다. … 따라서 우리는 회개하지 않은 우리의 무관심을 통회하며, 사회 참여(social involvement)가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점을 인정하지 못한 것을 회개한다. …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는 둘 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
> — 로잔 언약 5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1974

이 다섯 줄이 20세기 복음주의를 1925년의 후퇴에서 다시 사회의 한복판으로 끌어냈다. 작성자는 존 스토트였다.

![존 스토트](/photos/john-stott-portrait.jpg)
**존 스토트(1921-2011).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1974년 로잔 언약의 기초 위원장. 평생 런던 올 솔즈(All Souls Langham Place) 한 교회의 목회자로 머물렀다. 출처: Langham Partnership International (BlueMoses 업로드), [Wikimedia Commons](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ohn_stott.jpg), CC BY 3.0.**

### 존 스토트라는 사람

빌리 그레이엄이 **전도자** 의 얼굴이라면, 존 스토트는 **신학자·목회자·기초 작성자** 의 얼굴이었다. 그는 평생 한 교회(런던 올 솔즈)의 목회자로 머물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제자도**·**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같은 책으로 한 세대의 강단을 다시 세웠다. 2005년 *Time* 지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에 그를 단독 복음주의자로 올렸을 때, 그가 한 일은 잡지 표지 사진 촬영을 정중히 거절한 것이었다.

스토트가 로잔에 남긴 또 한 가지가 있다. 1974년 회의 마지막 날, 르네 파딜라(René Padilla, 에콰도르)와 사무엘 에스코바르(Samuel Escobar, 페루) 같은 라틴아메리카 신학자들이 미국식 **복음주의 = 정치적 보수** 의 등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스토트는 그들의 비판을 막지 않고 **받았다**. 5조 「사회적 책임」이 언약문에 들어간 것은 그 결정의 결과였다. 복음주의가 미국의 한 지방 운동으로 굳지 않고 **세계 운동** 이 된 결정적 순간이었다.

## 오해와 진실

### 오해 1 — "복음주의 = 미국 우파"

미국 언론이 *evangelical* 을 **백인 정치 보수** 의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굳어진 오해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본질적으로 **신학적 운동** 이지 **정치적 진영** 이 아니다. 21세기 세계 복음주의 인구는 약 6억 명으로 추산되고, 그중 다수는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의 비백인 비미국인이다. 한국·브라질·나이지리아·중국 가정교회 — 이들은 미국 정치 좌표에서는 어느 한쪽으로 분류될 수 없다.

### 오해 2 — "복음주의 = 부흥회 결단주의"

지난 편(D1)에서 다뤘듯, **결단의 손들기** 는 19세기 찰스 피니의 **새로운 방법**(new measures) 에서 유래한 한 갈래일 뿐 복음주의 전체가 아니다. 빌리 그레이엄 자신이 후기에는 자기 **결단 카드** 시스템에 대해 자주 말했다 — "**카드를 쓴 사람이 곧 회심한 사람이라 생각한 적은 없다. 결단 카드는 지역 교회로 그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일 뿐이다.**" 그는 모든 집회에서 결단자에게 **지역 교회의 양육** 을 의탁하는 시스템을 고집했고, 이 한 가지가 그를 19세기 후반 부흥사들과 구별한 결정적 차이였다.

### 오해 3 — "복음주의 = 반지성"

1925년 스코프스 재판 이후 한 세대의 후퇴가 만든 인상이지만, 신복음주의 70년의 역사는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풀러·휘튼·트리니티·고든-콘웰·웨스트민스터 — 20세기에 학문 전통을 회복한 복음주의 신학교들이다. 칼 헨리의 **『하나님, 계시, 권위(God, Revelation and Authority)』** 6권은 20세기 영어권 조직신학의 표지석 중 하나다. 마크 놀(Mark Noll)의 1994년 책 **『복음주의 정신의 스캔들(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 은 복음주의의 반지성주의 잔재를 **내부에서** 비판한 자기 진단의 책이었다 — 첫 문장이 유명하다. "**복음주의 정신의 스캔들은, 복음주의 정신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이 만든 자기 성찰이 21세기 영어권 복음주의 학계의 새 흐름을 열었다.

### 오해 4 — "복음주의 = 사회 무관심"

1974년 로잔 언약 5조 이후 이 오해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2010년 케이프타운 언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환경·이주민·박해받는 교회·세계 빈곤·인신매매** 를 복음주의의 의제로 명시했다. 복음주의 안에 **사회 참여** 를 둘러싼 지속적 긴장은 있다. 그러나 **무관심** 은 이미 합의된 의제가 아니다.

## 현재는 어디에 있나

### 한국 — 운동의 다층성

한국 복음주의의 지형을 한 줄로 그릴 수는 없다. 한기총·한교총 같은 연합 기구, CCC·IVF·예수전도단 같은 캠퍼스 선교단체,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같은 사회 참여 그룹, 분당우리교회·사랑의교회 같은 대형 교회의 갱신 흐름, 학원복음화협의회·복음과상황 같은 신학·문화 매체 — 이 모두가 자기를 **복음주의** 라 부른다. 1974년 로잔 한국 위원회가 출범한 이래 한국은 세계 로잔 운동의 핵심 거점 중 하나였고, 2024년 9월 인천 송도에서 열린 제4차 로잔 대회(Lausanne 4)는 약 200개국 5,400명을 모은 21세기 최대의 글로벌 복음주의 회의였다.

### 세계 — 남반구로 이동한 무게중심

21세기 기독교의 무게중심은 이미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했다. 2050년이면 세계 그리스도인의 약 75%가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아시아에 살 것으로 *Pew Forum* 은 추산한다. 케냐·나이지리아·브라질·중국 가정교회·한국 — 이들이 21세기 세계 복음주의의 새 척추다. **복음주의가 미국 운동이라는 인상** 은 이미 통계적으로 시대착오다.

### 도전 — 정치 도구화·번영신학·세대 단절

복음주의가 21세기에 마주한 세 가지 큰 도전이 있다.

첫째, **정치 도구화**. 미국에서는 트럼프 시대 이후 **복음주의자** 라는 단어가 신학적 정의를 잃고 정치적 부족(部族, tribe)의 표찰로 전락했다는 자기 진단이 운동 내부에서 거듭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광장 정치와 강단의 거리감이 모호해지는 일이 반복된다.

둘째, **번영신학**.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한국의 일부 대형 사역에서 **번영의 약속이 복음의 자리** 를 차지한다. 이는 본 시리즈가 따로 다룬 주제이며(번영신학 2부작), 복음주의 내부의 가장 첨예한 비판 대상이다.

셋째, **세대 단절**. 젊은 세대가 **복음주의** 라는 이름표를 떠나는 흐름이 한국·영미 모두에서 관측된다.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 정치 결합·성 윤리 논쟁·교회의 권위주의·번영주의에 대한 환멸이 모두 섞여 있다. 빌리 그레이엄이 2018년 99세로 별세한 뒤, **그가 대표한 형식의 복음주의** 가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수될 것인가는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다.

## 부흥은 다시 어디로 가는가

20세기 복음주의의 100년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다 — **자유주의의 침식 앞에서 다섯 근본 교리로 방어선을 긋고, 근본주의의 후퇴를 떠나 신복음주의로 사회로 다시 들어왔으며, 빌리 그레이엄의 강단과 존 스토트의 로잔 언약으로 자기 좌표를 세계화했다.**

그 100년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복음주의**는 다음 세기에도 같은 단어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름을 입을 것인가. 그 질문에 답하는 길은 한 가지뿐이다 — 베빙턴의 네 축으로 돌아가는 것. 성경의 권위, 십자가의 중심성, 회심의 실재, 그리고 사회로 다시 들어가는 활동. 이 네 가지가 살아 있는 한, 단어는 바뀌어도 운동은 살아남는다.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
> — 디모데후서 4:2

여의도 광장의 110만 명도 사라지고, 빌리 그레이엄의 마지막 호흡도 멎었다. 그러나 그가 평생 외쳤던 한 본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 "**성경은 말한다(The Bible says).**" 이 짧은 어구가 20세기 복음주의의 가장 정직한 자기 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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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주의의 견해

20세기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개혁주의의 평가는 크게 **환영**, **분별**, **회복** 의 세 단으로 정리된다.

### 환영 — 운동이 회복한 것들

복음주의 운동이 회복한 것들은 종교개혁의 다섯 **솔라**(*Sola Scriptura*·*Sola Fide*·*Sola Gratia*·*Solus Christus*·*Soli Deo Gloria*) 와 일치한다. 성경의 최종 권위(*Sola Scriptura*), 십자가의 대속과 이신칭의(*Sola Fide*·*Sola Gratia*·*Solus Christus*), 회심의 실재 — 이 모든 것이 자유주의가 비신화화하려 했던 바로 그 지점이며, 복음주의가 한 세기 동안 지켜낸 자리다. 개혁주의는 이 자리에서 복음주의와 **근본적으로 한 가족** 이다. 빌리 그레이엄 한 사람이 한 세기에 걸쳐 한 일 — 성경의 권위와 십자가의 대속을 단순한 언어로 두 대륙에 전한 일 — 은 한 인간이 한 세기에 할 수 있는 일의 한계 가까이를 보여줬다. 개혁주의가 그를 비판할 자격을 갖기 전에, 먼저 감사해야 할 자리다.

### 분별 — 복음주의가 잃기 쉬운 네 가지

그러나 **복음주의 일반** 이 잃기 쉬운 것들도 분명하다. 개혁주의가 복음주의 안에서 끊임없이 환기해야 할 네 가지가 있다.

첫째, **결단주의(decisionism)의 위험**. 19세기 피니의 **새로운 방법** 에서 흘러온 **결단 손들기 = 회심** 의 등식은 도르트 신경(전적 부패·무조건적 선택·불가항력적 은혜)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빌리 그레이엄 자신이 **결단 카드는 회심의 증명서가 아니라 지역 교회로의 다리** 라 했지만, 한국 강단에서는 이 구별이 거의 사라졌다.

둘째, **"단순한 복음" 강조의 부작용 — 교리 빈곤**. 복음주의는 **전도가 가능한 단순한 메시지** 를 강조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교리적 폭과 깊이** 를 양보해 왔다. 결과는 베빙턴의 네 축은 알지만 사도신경의 한 조항도 풀어 설명하지 못하는 신자다. 마크 놀이 진단한 "**복음주의 정신의 스캔들**" 의 한 측면이 여기 있다.

셋째, **개인 회심 중심이 약화시킨 언약 신학과 교회론**. **나 한 사람의 회심** 을 핵심으로 두면서, **언약 공동체로서의 교회**·**언약의 자녀로서의 신앙 양육**·**가시적 교회의 직제와 권징** 같은 개혁주의의 강조가 흐려진다. 한국 복음주의가 **작은 모임·셀·집회** 의 강조 뒤에서 **지역 교회의 회중적 무게** 를 잃어버린 한 이유가 여기 있다.

넷째, **사회 참여의 얕음 — 공적 신학으로 깊어지지 못한 한계**. 1974년 로잔 5조의 회복은 위대했으나, 그것이 **공적 신학**(public theology) 으로 깊어진 것은 아니다. 어떤 영역에서 어떤 신학적 근거로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는가에 대한 정밀한 신학이 부재한 채로 **참여** 만 강조될 때, 그것은 한 시기에는 보수 진영의 도구가 되고 다른 시기에는 진보 진영의 도구가 된다. 양쪽 모두 복음주의 자신의 신학적 자율성이 무너진 결과다.

### 회복 — 두 전통이 만나야 할 자리

개혁주의가 복음주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자세는 **대결** 이 아니라 **결합** 이다. 복음주의의 **열정과 단순성과 전도 사명** 은 살리되, 개혁주의의 **교리적 정밀성과 언약 신학과 교회론** 과 결합되어야 한다. 1974년 로잔 언약이 보여준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양립** 은 우연이 아니라 신칼뱅주의(아브라함 카이퍼·헤르만 바빙크)의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 신학과 자연스럽게 만난다. 카이퍼의 "**인간 삶의 전 영역 중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다' 라고 외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 평방 인치도 없다**" 는 1880년 자유대학교 개교 연설은, 100년 뒤 로잔의 5조와 같은 곡선을 그린다.

한국 교회의 길도 같은 자리에 있다. **부흥회 결단주의** 가 아니라 **언약적 회심·교회 중심 양육**. **대중 집회의 통계** 가 아니라 **지역 교회의 권징과 양육**. **정치 진영의 도구화** 가 아니라 **공적 신학에 근거한 분별 있는 사회 참여**. 1907년 평양 대부흥의 회개와 1973년 여의도의 결단을 자기 역사 안에 동시에 가진 한국 교회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은, 두 전통의 결합 위에서만 가능하다.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
> — 골로새서 2:6-7

**뿌리를 박으며**(개혁주의의 교리), **세움을 받아**(복음주의의 양육), **굳게 서서**(공적 신학의 분별), **감사함을 넘치게**(전도의 열정). 한 본문 안에 두 전통이 함께 있다. 20세기 복음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은, 이 한 본문 위로 두 전통이 다시 만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