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B2: 동방정교회 — 서방이 잊은 또 하나의 2천 년

> 1054년 대분열, 필리오케 논쟁, 신화(theosis)와 이콘 — 개혁주의 눈으로 읽는 동방정교회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교회사, 동방정교회, 교회의뿌리를찾아서, 1054년대분열, 필리오케
- 게시일: 2026-08-22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church-history-eastern-orthodox/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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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4년 7월 16일, 하기아 소피아의 제단

![하기아 소피아 내부](/photos/hagia-sophia-interior.jpg)
**콘스탄티노플 하기아 소피아 내부. 1054년 7월 16일, 이 제단 위에 동서 교회의 운명을 가른 파문장이 놓였다. 출처: [Wikimedia Commons](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agia_Sophia_Interior.jpg), CC BY-SA.**

한 통의 문서가 제단 위에 놓였다. 로마 교황 레오 9세의 특사 훔베르트 추기경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한다는 교서였다. 케룰라리오스는 즉시 맞파문으로 응수했다. 역사는 이 하루를 "대분열(Great Schism)"로 기록한다.

그러나 이 장면은 1054년 갑자기 벌어진 사건이 아니다. 그 이전 수백 년 동안 동과 서는 언어(라틴어 vs 헬라어), 정치(교황권 vs 황제권), 예전,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학**에서 서서히 갈라지고 있었다. 제단 위의 파문장은 이미 벌어진 균열의 서명일 뿐이었다.

한국 개신교 신자 대부분에게 동방정교회는 낯선 이름이다. 러시아 드라마의 금빛 성화, 이국적 향연(香煙)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울 마포의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는 지금도 한국정교회 신자들이 예배드리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2억 명 이상이 이 전통을 따른다. 서방 교회가 잊은 또 하나의 2천 년이 거기 있다.

![동방정교회의 지리적 골격 — 5대 총대주교구와 자주교회 지도](/maps/map-eastern-orthodox.png)
**5대 총대주교구는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알렉산드리아·안티오크·예루살렘이었다. 1054년 대분열로 로마가 떨어져나간 뒤 동방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키예프·모스크바로 북상했고, 19~20세기에 그리스·세르비아·루마니아·불가리아·조지아 자주교회로 확장되었다. 점선은 비잔틴 선교가 슬라브 세계로 퍼진 길이다.**

## 필리오케 — 한 단어가 교회를 갈랐다

동서 분열의 교리적 심장에는 라틴어 한 단어가 있다. **필리오케**(**Filioque**) — "그리고 아들로부터."

본래 325년 니케아 신경과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성령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 그러나 6세기 스페인 톨레도 공의회 이후 서방 교회는 이 구절에 "그리고 성자로부터(Filioque)"를 덧붙이기 시작했고, 11세기 무렵 로마가 이를 공식화했다.

동방은 이를 이중으로 거부했다. 첫째, 공의회가 확정한 신경을 일방적으로 수정한 것은 **보편 교회의 합의를 깨뜨린 월권**이다. 둘째, 신학적으로 성령의 발출 원리가 성부와 성자 양쪽에 있다면, 삼위일체 내부의 단일한 원천(monarchia)이 훼손된다는 것이다. 9세기 총대주교 포티우스는 이것을 삼위일체론의 근본 오류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는 어느 편인가. 성경의 증거는 이렇다.

>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
> — 요한복음 15:26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
> — 요한복음 16:7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되, 성자에 의해 보내심을 받는다. 서방의 필리오케는 성자가 성령 발출에 관여함을 고백하여 이 구절들의 증거에 충실하려 한 것이다. 다만 표현의 정교함에서 보자면, 성령은 성부로부터 **원리적으로**(**principaliter**) 나오되 성자와의 **관계 안에서** 나오신다고 말할 때, 동방의 우려(성령의 종속)도 비껴갈 수 있다. 칼뱅이 기독교강요 제1권에서 삼위일체를 다룰 때 취하는 신중함이 바로 이 자리다.

## 이콘 — 성육신이 형상화를 정당화하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삼위일체 이콘](/photos/rublev-trinity-icon.jpg)
**안드레이 루블료프(c. 1360–1430)의 「삼위일체」(15세기 초). 마므레의 세 천사를 통해 삼위일체를 형상화한 동방 이콘의 정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출처: 안드레이 루블료프, [Wikimedia Commons](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gelsatmamre-trinity-rublev-1410.jpg), Public Domain.**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콘 공경을 정식 교리로 확정했다. 논거는 성육신이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셨으므로, 그분의 형상은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동방은 엄격히 구분한다. 이콘에 드리는 것은 **경배**(**latreia**)가 아니라 **공경**(**timē**)이다.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그러나 제2계명의 무게를 듣는 귀에 이 구별은 불충분하다.

>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
>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
> — 출애굽기 20:4-5

이 명령은 거짓 신의 형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참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 형상으로도 표상하려는 시도 자체를 금한다. 성육신이 형상화를 정당화한다는 논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나누어 인성만을 그릴 수 있다고 가정하는데, 이는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에 비추어 신학적으로 정합하지 않다. 칼케돈 공의회가 확정한 "나누이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 두 본성의 연합을 기억한다면, 인성만 분리해 캔버스에 옮기는 순간 그리스도는 이미 그 그리스도가 아니다.

![블라디미르의 성모 이콘](/photos/vladimir-mother-of-god.jpg)
**「블라디미르의 성모」(12세기). 비잔틴에서 키이우 루스로 전해져 러시아 정교회의 가장 사랑받는 이콘이 되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Vladimirskaya.jpg), Public Domain.**

## 신화(theosis) — 동방의 구원론

동방 구원론의 핵심 범주는 **신화**(**theosis, 神化**)이다. 4세기 아타나시우스의 유명한 명제가 이를 요약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신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14세기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는 이를 정교화하여, 피조물은 하나님의 **본질**(**ousia**)에는 결코 참여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에네르게이아**(**energeia, 활동·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성경적 뿌리가 없지 않다.

>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
> — 베드로후서 1:3-4

문제는 이 구조 안에서 서방 종교개혁이 회복한 **법정적 칭의**(**iustificatio forensica**)가 희미하다는 것이다. 동방은 죄를 주로 **죽음과 부패**(**phthora**)의 문제로 이해하고, 구원을 신적 생명에의 참여로 이해한다. 풍성한 통찰이다. 그러나 죄책(reatus)의 문제, 곧 의로운 재판관 앞에서 죄인이 어떻게 의롭다 선언받는가라는 질문은 선명하지 않다. 바울은 이 질문을 피해 가지 않았다.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 — 갈라디아서 2:16

개혁주의 전통은 성화와 영화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glorificatio)는 동방의 theosis와 상당 부분 겹친다. 다만 한 가지는 양보할 수 없다.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존재론적 간격**은 영화 이후에도 영원히 유지된다. 우리는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만, 신이 되지는 않는다. 연합은 본질의 혼합이 아닌 관계적·언약적·법적 연합이다.

## 성경과 전통 — 권위의 문제

가장 근본에는 권위 문제가 있다. 동방정교회는 성경과 **거룩한 전통**(**Holy Tradition**)을 계시의 두 원천으로 본다. 일곱 공의회, 교부들의 합의, 전례, 이콘 모두 전통의 일부이며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

종교개혁이 회복한 **Sola Scriptura**는 전통의 유용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칼뱅만큼 교부를 자주 인용한 종교개혁자도 드물다. 다만 전통은 성경의 해석을 돕는 보조적 증언일 뿐, 성경과 나란히 서는 권위의 원천일 수 없다. 인간의 합의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해지는 순간, 결국 말씀이 사람의 말 아래로 내려앉는다.

## 한국 교회,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경계할 것인가

한국 교회와 동방정교회 사이에는 불편한 공명이 있다. 체험 중심 신앙, 신비적 연합의 강조, 예배의 감각적 무게. 이 공명은 긍정적으로는 기회이고, 부정적으로는 위험이다.

**배울 것.** 금빛 성화와 연기 피어오르는 향, 천 년 이상 불려온 성가 앞에서 동방 신자는 몸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체현한다. 예배를 문화 콘텐츠로 소비하는 시대에,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는 본능은 개혁주의 예배가 회복해야 할 무게다. 삼위일체의 위격적 교제(perichoresis)를 지우지 않는 신학적 신중함,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남긴 "한 본질, 세 위격"의 언어도 칼뱅이 직접 의존한 유산이다.

**경계할 것.** 전통과 성경의 동등화, 마리아와 성인에게 올려지는 중보 기도, 칭의와 성화의 흐릿한 경계, 이콘 공경. 이 네 가지는 Sola Scriptura의 렌즈로 볼 때 양보할 수 없는 분기점이다.

## 형제이되, 개혁이 필요한 전통

동방정교회는 이단이 아니다. 니케아 신경을 보존하고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정통을 지켜온 고대 교회의 유산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공교회적 유산(catholica hereditas)을 함께 소유한 형제를 본다.

그러나 형제라고 해서 분별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2천 년을 이어 온 전통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심장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죄인의 확신 — 이 흐릿해질 때, 그 전통은 개혁(reformatio)이 필요하다. Sola Scriptura, Sola Gratia, Sola Fide. 오래됨이 곧 옳음은 아니다. 오래된 것은, 말씀 앞에서 다시 검증받음으로써만 산다.

1054년 하기아 소피아의 제단에 놓인 그 파문장은 여전히 걷히지 않았다. 서방이 잊은 또 하나의 2천 년은 지금도 거기에 있다. 우리는 그 앞에서 귀를 열되, 말씀의 저울을 내려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