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을 잔잔케 하시는 분 (막 4:35–41) — 배 안에 잠드신 창조주

> 갈릴리 밤의 광풍 한가운데,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한 사람이 있다. 그분이 깨어 말씀하시자 바다가 순종했다. 그분은 누구이신가.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성경본문탐구, 신약, 마가복음, 기적
- 게시일: 2026-09-23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bible-study-mark4-storm/
- 컬렉션: blog

---

>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
>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
>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
>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 **40**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
>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
> — 마가복음 4:35-41 (개역개정)

## 그분은 누구이신가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순종하는고.**" 마가는 이 물음을 독자의 가슴에 못 박는다. 폭풍을 꾸짖어 잠재운 분, 그런데 조금 전까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던 분. 이 두 장면을 같은 한 인격으로 붙여 놓은 채 마가복음 4장은 끝난다.

## 갈릴리의 밤, 베개의 무게

갈릴리 호수는 해수면보다 약 200m 낮은 분지다. 헤르몬 산에서 내려오는 찬 기류가 호수의 따뜻한 공기와 부딪치면 몇 분 만에 광풍으로 바뀐다. 어부 출신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가 죽게 된 것을**"이라고 외쳤다면, 이것은 단순한 돌풍이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고물**(배의 뒤편)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마가의 원문은 이 세부를 집요하게 보여 준다. 베개를 베었다는 한 단어가 본문 전체의 무게 중심이다. 물이 배에 가득하게 들어찬 순간, 오직 한 사람만이 흔들리지 않았다.

## 잠드신 인성, 꾸짖으시는 신성

초대 교회는 이 한 장면에서 두 본성을 읽었다. **잠**은 환상이 아니다. 피로하고, 허기지고, 졸리는 참된 인간의 몸이 있었다(히 4:15). 베개를 벤 것은 작은 세부가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제사장**(히 2:17-18)의 살아 있는 증거다. 그분이 우리의 연약을 아시는 것은 그것을 친히 사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어 일어나신 그분은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고 명령하셨다. 그것은 조언도 기도도 아닌 명령형이다. 구약의 독자는 이 음성을 즉시 알아듣는다.

>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
> — 시편 89:9

>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
> — 시편 107:29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폭풍을 명령 한 마디로 잠재우는 분은 오직 한 분, 야웨시다. 마가는 따로 해설하지 않는다. 본문 자체가 칼케돈의 고백을 앞당겨 보여 준다 — 한 인격,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리 없이 분열 없이 결합된 두 본성.

## 배 안에 계신 분, 그러므로

칼뱅은 이 본문에서 섭리의 진수를 본다. 주님은 **배 안에** 계셨다. 잠드신 것이지 떠나신 것이 아니다. 제자들이 잊은 단 하나는 이 사실이었다.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외침은 물리적 거리의 불평이 아니라, 그분의 침묵이 곧 부재라고 오해한 마음이다.

그러나 시편 121편은 말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신성으로는 결코 졸지 않으시는 분이, 인성으로는 우리와 같은 배 위에서 베개를 베신다. 이것은 연약함이 아니라 **연대**다. 폭풍은 배를 삼키려 하지만, 배 안에 창조주가 계시면 폭풍이 배를 삼킬 수 없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두려움 자체가 죄는 아니다. 문제는 그분이 배 안에 계신다는 사실이 그 두려움 밑으로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제자들은 폭풍을 그리스도보다 더 크게 보았다.

## 이 폭풍이 가리키는 십자가

마가는 이 장면을 우연히 기록하지 않았다. 다섯 장 뒤, 같은 갈릴리 호수 위에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며 다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막 6:50) 하신다. **"내니**"는 출애굽기 3:14의 그 이름이다. 그리고 마침내 한 사건이 더 남아 있다 — 십자가.

갈릴리의 배 안에서 그분은 **잠**으로 폭풍을 견디셨다. 골고다의 언덕 위에서 그분은 **죽음**으로 더 큰 폭풍을 받으셨다. 우리 위에 쏟아졌어야 할 하나님의 진노, 그 궁극의 광풍이 그분의 몸 위에서 터졌다. 배 안의 잠이 우리의 연약을 동정하심의 증거였다면, 십자가 위의 죽음은 그 동정이 어디까지 내려가는지를 보여 준다.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은 잠잠케 하지 않으셨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순종하는고.**" 대답은 부활 아침에 비로소 열린다. 무덤조차 그분에게 순종했다.

## 내 배에 들이치는 물

오늘도 물이 배에 가득 들어찬다. 진단서 한 장, 해고 통보, 끊어진 관계, 밤새 걷히지 않는 의심. 제자들의 외침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말로 우리의 입에서 터진다 —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러나 본문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폭풍의 크기가 아니다. **그분이 배 안에 계신가**이다. 그분의 고요는 무관심이 아니다. 그것은 권능의 다른 얼굴이다. 그분이 지금 조용하신 것은 그 폭풍을 이미 손안에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참된 신앙은 폭풍이 없는 삶이 아니다. 폭풍 한가운데서 잠드실 수 있는 분이 내 배 고물에 계신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다. 제자들은 폭풍이 그친 뒤 **더 크게** 두려워했다 — 그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경외였다. 창조주를 본 피조물의 떨림이었다.

오늘 밤 당신의 배에도 같은 분이 타고 계신다. 그분은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한 마디를 하시는 순간, 파도는 그분의 이름을 기억해 낸다. 그러니 먼저 그분을 깨우라. 그리고 그분의 얼굴을 보라. 폭풍을 보는 눈은 겁에 질리지만, 그분을 보는 눈은 마침내 잔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