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 위의 고백 — 아무것도 없는 자가 모든 것을 얻다

> 죽기 직전 아무 공로 없이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가 묻는 것: 구원이란 대체 무엇인가?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성경본문탐구, 신약, 누가복음, 구원론
- 게시일: 2026-07-25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bible-study-luke23-thief/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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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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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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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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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
>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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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복음 23:39–43

## 죽어가는 자가 왕을 알아보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고, 세례를 받을 물도 없었고, 교회에 발을 들일 시간도 없었다. 선행은커녕 십자가에 달릴 만한 삶을 살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못 박힌 손과 꺼져가는 숨뿐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죽기 직전,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 구원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은 2천 년 전 골고다에서 시작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닿는다.

## 세 개의 십자가, 하나의 현장

누가복음 23장의 이 장면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당시 로마의 십자가형은 가장 치욕적인 형벌이었다. 세 사람이 나란히 달렸고, 가운데가 예수였다. 양옆은 행악자(κακοῦργοι) — 단순한 절도범이 아니라, 중범죄자였다.

누가는 이 장면을 대조의 구조로 기록한다. 같은 형벌, 같은 고통, 같은 예수 곁 — 그러나 완전히 다른 두 반응. 한쪽은 비방이고, 한쪽은 고백이다. 누가는 이 대비를 통해 묻는다: 같은 자리에서 무엇이 이 둘을 갈라놓았는가?

## 두 강도 — 자연적 반응과 초자연적 고백

왼편 강도의 말은 자연스럽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본능, 구원을 자기 필요의 도구로 삼으려는 욕구다. 그의 관심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지, 예수가 누구인지가 아니다.

오른편 강도의 말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의 고백에는 네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참된 회심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선 자의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둘째, **자기 죄의 인정**이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마땅하거니와." 이것은 후회가 아니라 고백이다. 자신이 정죄받아 마땅하다는 자기 심판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무죄 선언**이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죄수가 옆의 죄수를 의로운 자로 증언하고 있다.

넷째, **은혜에 대한 전적 의탁**이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공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그분의 주권적 자비에 매달리는 간청이다.

이 고백의 가장 놀라운 점은 시점이다. 온 세상이 예수를 버렸다. 제자들은 도망쳤고, 군중은 조롱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비웃었다. 모든 외적 증거가 "이 사람은 패배자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낮고 절망적인 자리에서, 죄인 하나가 피 흘리며 죽어가는 처형수에게서 나라에 임할 왕을 보았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성령께서 여신 눈이었다. 바울의 말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 — 고린도전서 12:3b

## 그리스도의 왕권이 가장 역설적으로 드러난 순간

예수의 응답은 강도의 간청을 넘어선다. "기억하소서"라고 구했는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답하셨다. 미래의 기억이 아니라, 오늘의 임재를 선언하신 것이다.

"오늘"(σήμερον)이라는 한 단어가 공로에 기반한 모든 구원론을 무너뜨린다. 주님은 "정화 후에", "공로를 쌓은 후에", "훗날"이라 하지 않으셨다. 칼뱅이 「기독교 강요」 3권 14장에서 논증한 바,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의를 세울 수 없으며,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으로부터 전가된다. 이 강도는 그 진리의 살아 있는 증거다. 선행도, 세례도, 성찬도, 고행도 없이 — 오직 믿음만으로 즉각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나와 함께"라는 표현도 주목해야 한다. 낙원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낙원이다. 강도가 얻은 것은 복된 환경이 아니라, 복된 인격과의 영원한 교제다.

그리고 이 선언이 일어난 시점이 결정적이다. 그리스도는 아직 죽지도 않으셨고, 부활도 승천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을 선언하신다. 제물로 죽어가는 바로 그 순간, 동시에 대제사장으로서 첫 번째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왕좌였다. 나무 위의 수치가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이 가장 역설적으로 계시되는 순간이었다.

## 이 본문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가리키는가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세 겹의 직분으로 나타나신다.

**선지자**로서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권위 있는 선언으로 구원의 진리를 직접 계시하신다.

**제사장**으로서 — 자신이 제물로 죽어가는 바로 그 순간, 중보자로서 죄인의 구원을 선언하신다.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대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히 7:25) 대제사장의 사역이 십자가 위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왕**으로서 —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주권적으로 선포하신다. 강도가 "당신의 나라"를 말했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가장 정확한 신학적 고백을 하고 있었다. 십자가가 곧 즉위식이었다.

## 오늘 우리에게

이 본문은 두 방향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첫째,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강도보다 더 늦은 사람은 없다. 문자 그대로 숨이 꺼져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셨다. 구원은 쌓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한 마디 — "예수여, 나를 기억하소서" — 그것으로 충분했다.

둘째, "아직 시간이 있다"고 미루는 사람에게. 왼편 강도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같은 예수 곁에서 같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비방하다가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은혜는 거저 주어지지만, 은혜를 내일로 미룰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두 강도 사이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 계신다. 한쪽에는 비방이 있고, 한쪽에는 고백이 있다. 그분은 고백하는 자에게 오늘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