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탐구: 새 언약의 예언 — 마음에 기록된 법 (렘 31:31–34)

> 바벨론의 그림자 아래서 예레미야가 본 언약의 완성 — 돌판에서 심령으로 옮겨진 법, 그리고 기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성경본문탐구, 구약, 예레미야, 새언약, 언약신학
- 게시일: 2026-08-04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bible-study-jer31/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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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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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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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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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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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레미야 31:31-34

## 시내산과 골고다는 다른 이야기인가

이 본문 앞에 서는 독자에게 남는 질문이 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분이신가. 시내산에서 돌판을 주신 분과 갈릴리에서 빵을 떼시며 "이것은 새 언약의 피"라 말씀하신 분은 두 개의 다른 경륜을 여신 것인가. 예레미야가 "옛 언약과 같지 아니할 것"(32절)이라 말할 때, 그는 언약의 교체를 예언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완성을 예언하고 있는가.

## 바벨론의 그림자 아래서 들려온 위로

예레미야 30~33장은 "위로의 서"(Book of Consolation)라 불린다. 하지만 이 위로가 선포된 정황은 축제가 아니다.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벽 앞에 진치고 있었고, 예언자 자신은 반역 혐의로 감금된 상태였다(렘 32:2). 도성은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민족은 포로로 끌려갈 참이었다.

바로 그 폐허의 문턱에서, 여호와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새 언약을 약속하신다. 이 배치를 놓치면 본문은 이해되지 않는다. 32절이 상기시키는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의 언약, 곧 시내산 언약은 왜 "깨뜨려진" 것으로 회상되는가. 돌판에 새겨진 법이 문제였는가. 아니다. 문제는 돌판을 받은 백성의 마음이었다. 법은 외부에 있었고, 순종할 힘은 내부에 없었다. 예레미야는 이 구조적 비극을 평생 목격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신 30:6) — 모세가 이미 예언했던 이 내면의 할례가, 이제 명시적 언약의 언어로 다시 선포된다.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31절) — 이미 분열되어 서로 남이 된 두 집에 동일한 약속이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이 언약이 인간의 성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서 출발함을 보여준다.

## 하나의 은혜언약, 두 경륜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이 본문을 다룰 때 한 가지 오독을 단호히 거부한다. 시내산 언약과 새 언약을 **두 개의 다른 언약**으로 쪼개는 독법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5-6항은 이를 명확히 한다. 구약과 신약은 "본질상 다른 두 은혜언약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언약이 서로 다른 경륜 아래 있는 것"이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2권 11장에서 같은 논리를 세 가지 축으로 정리한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실체(substantia)에서 동일하다 — 동일한 자비, 동일한 중보자, 동일한 믿음 칭의. 다른 것은 경륜(administratio)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새로워졌는가". 본문 자체가 답한다.

첫째, **법의 위치 이동**(33절). 돌판에서 심령으로. 이는 매체의 교체가 아니라 새 감정의 주입이다. 옛 언약의 비극은 법을 들었으나 사랑하지 않은 것이었다. 시내산의 뇌성과 번개는 두려움을 낳았으나 아름다움을 향한 사랑은 창출하지 못했다. 새 언약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법을 신자의 가장 깊은 욕구로 심으신다. 노예의 복종과 자녀의 순종 사이의 거리가 여기에 있다.

둘째, **인격적 관계의 실현**(33절).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 문장은 창세기부터 반복되어 온 언약 공식이지만, 새 언약에서는 각 개인의 심령에 실재로 새겨진다.

셋째, **전원적 지식**(全員的, 34절).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여기서 "안다"의 히브리어 야다(יָדַע)는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인격적·언약적 친밀함이다. 더 이상 선지자 계급이 중보하여 "여호와를 알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다 — 성령이 각 사람 안에 직접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넷째, **완전한 죄 사함**(34절). 그리고 이것이 앞선 셋의 기초다.

##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작정된 망각

34절의 마지막 선언 앞에 멈춰야 한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의지의 선언이다. 작정으로 기억하지 않으신다. 법정의 재판관이 고소장을 불태우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를 덮어 감추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것이다. 없어진 것은 기억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수많은 성도가 이 재 속에서 불탄 글자를 긁어모은다. 오래전 지은 죄 하나를 밤마다 꺼내어 다시 읽는다.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지만, 정말일까." 이 문장 하나가 새 언약의 전 무게를 지고 있다.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신 죄를, 우리가 기억해 자신을 정죄할 권리는 없다.

## 이 본문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가리키는가

예레미야가 본 새 언약은 예언의 영역에 남지 않았다. 유월절 다락방에서 예수께서 잔을 드셨을 때, 그분은 이 예언을 자기 피 안으로 끌어들이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눅 22:20). 예레미야가 내다본 언약의 날이 바로 그날 저녁에 임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명시적으로 선언한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 히브리서 8-10장 전체가 예레미야 31장의 성취 선언이다. 옛 언약의 제사장들은 매년 반복해서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갔으나 결코 죄를 없애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자기 피를 들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12).

그러므로 예레미야 31장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다. 십자가에서 성취되었고, 오순절에 적용되었으며, 지금 모든 신자의 심령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본문을 천년왕국의 미래 이스라엘에만 적용하는 세대주의적 독법은 히브리서 기자의 현재형 성취 선언("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 히 8:6)과 충돌한다. 갈라디아서 3장 29절이 말하듯, 아브라함의 씨는 혈통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한 새 사람"(엡 2:15) — 이것이 새 언약 공동체의 실체다.

그리고 새 언약의 중보자는 단지 언약을 맺으신 분이 아니다. 히브리서 9장 15-22절이 말하듯, 언약은 세운 자의 죽음 없이 발효되지 않는다. 예레미야가 약속한 사중의 복 — 율법 내면화, 인격적 관계, 전원적 지식, 완전한 죄 사함 — 이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선물이다. 성령이 오늘 우리 마음에 법을 기록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언약을 피로 인치셨기 때문이다.

## 오늘 우리에게

"마음에 기록된 법." 이 한 구절이 오늘 한국 교회의 많은 피로를 진단한다.

새 언약 아래 있는 신자가 구 언약의 심리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죄책감으로 주일을 지키고, 의무감으로 헌금을 드리고, 두려움으로 기도한다. 새벽기도 횟수로 영성을 등급 매기고, 심방 명단을 피해 다니며 종교 소비자의 부담을 느낀다. 이것은 새 언약의 외피를 두른 옛 언약 율법주의다. 법은 여전히 바깥에 있고, 순종은 강요로 추출된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가 이 문제를 **프로그램**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더 많은 소그룹, 더 정교한 커리큘럼, 더 화려한 예배. 이는 율법의 방식 — 외부 형식을 강제하여 내부를 조정하려는 시도 — 의 변주일 뿐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31장이 말하는 갱신의 방향은 정반대다. 하나님은 **내면에 직접 역사하신다**. 법을 마음에 **기록하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고, "다 나를 알리라"의 주체는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강단의 회복은 프로그램의 추가가 아니라 성령 내주로의 회귀다. 목회자의 과제는 더 효율적인 외적 장치를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맛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성도의 과제는 더 많은 일정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조용히 동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책의 재 속에서 글자를 긁어모으고 있는 사람에게 이 본문은 마지막 말을 남긴다.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시기로 한 것을 당신이 기억할 권리는 없다. 그분은 죄를 덮지 않으셨다. 없애셨다. 없어진 것을 어떻게 다시 꺼낼 수 있겠는가.

예레미야가 감옥에서 본 새 언약의 날은, 골고다에서 터져 나왔고, 오순절에 당신의 심령에 도착했다. 이제 돌판을 떠나, 이미 당신 마음에 기록된 그 법을 읽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