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초에 하나님이 — 창세기 1:1-2:3

> 무에서 유를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 그 영광의 극장 앞에 서다. 창조 서사가 열어 보이는 삼위일체의 작정과 안식의 약속을 읽는다.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성경본문탐구, 구약, 창세기, 창조, 삼위일체
- 게시일: 2026-06-30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bible-study-gen1/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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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창세기 1:1-2:3 (발췌)

>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 **2**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
>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 **4**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
>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 창세기 1:1-5

>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 창세기 1:26-28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 — 창세기 1:31

>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
>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
>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 — 창세기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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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태초에"인가

성경은 논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변론도, 해명도 없다. 첫 문장은 선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일곱 단어 앞에서 모든 세계관은 선택을 강요당한다. 영원한 물질이 있었는가, 아니면 하나님만 계셨는가. 세계는 신의 본질에서 흘러나온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의지로 불려 나온 것인가. 만물은 신의 일부인가, 아니면 그분 앞에 선 피조물인가.

성경의 첫 문장은 이 모든 물음에 한꺼번에 답한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를 경외 앞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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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문학적 맥락

### 무에서의 창조가 부정하는 것들

히브리어 동사 **바라**(**בָּרָא**)는 구약 전체에서 오직 하나님의 행위에만 사용된다. 사람이 무언가를 "만든다"(**עָשָׂה**, 아사)고 할 때와는 다른 동사다. 바라는 기존 재료를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존재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교회는 이것을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교리로 고백해 왔다.

이 고백이 동시에 부정하는 것들이 있다. 물질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존재했다는 **영원한 물질론**, 세계가 하나님의 본질에서 흘러나왔다는 **유출론**,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는 **범신론**, 선한 신과 악한 질료가 대등하게 맞선다는 **이원론**. 창세기 첫 절은 이 네 가지를 단번에 무너뜨린다. 하나님 이외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세계는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고, 질료는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가 아니다.

### 형태와 채움의 건축술

6일 창조 서사는 정교한 문학적 구조를 갖고 있다. 1-3일은 **형태를 부여**하고(빛과 어둠의 분리, 물과 궁창의 분리, 바다와 뭍의 분리), 4-6일은 그 형태 안에 **거주자를 채운다**(광명체, 새와 물고기, 육지 동물과 인간). 혼돈하고 공허한 땅(1:2)이 질서와 생명으로 가득 차는 과정이다.

이 구조 전체는 제7일을 향해 수렴한다. 고대 근동의 신전 창건 서사에서 신이 궁전을 완성한 뒤 그 안에 좌정하듯, 하나님은 천지라는 성전을 지으시고 안식으로 들어가신다. 에덴은 하나님의 성소였고, 아담은 그 성소의 제사장적 청지기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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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적 핵심

### 말씀으로 창조하심 — 인격의 행위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 문장의 무게를 잠시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재료를 모으지 않으셨다. 도구를 쓰지 않으셨다. **말씀하셨다.** 그리고 없던 것이 있게 되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 — 시편 33:6

말씀에 의한 창조는 세 가지를 드러낸다. 첫째, 창조는 **지성의 행위**다. 세계는 맹목적 힘의 폭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던 뜻(idea)이 실현된 것이다. 둘째, 창조는 **의지의 행위**다. 하나님은 창조하지 않으실 수도 있으셨다. 그분이 창조하신 것은 필연이 아니라 자유이며, 그 자유는 사랑과 선하심에서 비롯되었다. 셋째, 말씀 창조에는 **삼위일체의 각인**이 있다. 성부가 작정하시고, 성자가 말씀으로 실행하시며, 성령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며 혼돈에 생명을 불어넣으신다. 한 본질 안의 세 위격이 창조를 함께 이루신다.

### "보시기에 좋았더라" — 영광의 극장

창세기 1장에는 후렴구가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טוֹב**, 토브). 이 선언은 첫째 날부터 반복되고, 여섯째 날에 이르러 "심히 좋았더라"(**טוֹב מְאֹד**)로 절정에 이른다.

이것은 품질 검사가 아니다. 하나님 외부의 기준으로 합격 여부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았더라"는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이 피조물 안에 반영되었다는 선언이다. 빛과 어둠의 분리, 물과 뭍의 구분, 각 종류대로 창조된 생물들 — 이 모든 질서와 다양성과 풍성함은 창조주의 탁월하심을 거울처럼 비춘다.

칼뱅은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theatrum gloriae Dei)이라 불렀다(기독교강요 I.14.20). 하늘과 땅, 별과 바다, 새와 짐승 —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을 반사하는 무대다. 피조 세계를 바라보며 감탄하지 않는 사람은, 극장에 앉아 무대를 보지 않는 사람과 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 극장을 여셨는가? 삼위일체 안에서 이미 완전한 사랑과 기쁨의 교제가 있었다. 하나님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창조는 결핍의 산물이 아니라 **충만함의 넘침**이다. 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은 물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가득 차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무나 충만하여 피조물을 향해 자신을 소통하기를 원하셨다 — 이것이 은혜의 기원이다.

### 6일의 배려

하나님은 순간적으로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으셨다. 그런데 왜 6일에 걸쳐 단계적으로 지으셨는가? 칼뱅은 이것을 하나님의 **배려**(accommodatio Dei)로 읽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이해력에 맞추어 창조를 단계적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각 피조물을 하나씩 묵상하고, 각 날의 작품 앞에서 감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6일 구조는 과학적 연대기를 보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왕으로서 자신의 궁전을 짓고, 마지막에 자신의 형상을 닮은 대리인을 그 안에 세우시는 **신학적 서사**다.

### 제7일 — 닫히지 않는 안식

6일의 각 날은 동일한 공식으로 닫힌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N째 날이니라." 그러나 제7일에는 이 공식이 없다. 안식일은 닫히지 않는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은 피로를 회복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완성의 선언이다. 더 이상 새로운 창조 질서를 만드실 필요가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2:3). 히브리어 카다쉬(**קָדַשׁ**) — 구별하다, 거룩하게 하다. 이것은 시간의 성화다. 모든 날이 동등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 구별된 날이 있다.

닫히지 않는 제7일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히브리서 기자가 답한다.

>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 — 히브리서 4:9-10

제7일의 안식은 창조의 종결이 아니라 **창조의 목표**다. 활동의 멈춤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충만한 안식이다. 이 안식은 타락으로 상실되었고, 시내산에서 율법적 안식일로 그림자만 남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열리고, 종말에 영원히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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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본문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가리키는가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이 이르시되"를 읽은 뒤, 요한복음 1장을 펼치면 숨이 멎는다.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 요한복음 1:1-3

창세기의 **말씀**(דָּבָר)은 요한복음의 **로고스**(Λόγος)다. "빛이 있으라" 하신 그 말씀은 영원한 아들이시다. 바울은 더 분명하게 선언한다.

>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 골로새서 1:16

"그로 말미암고"(through Him)는 창조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그를 위하여"(for Him)는 창조의 목적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만물을 지으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요 1:14). **창조의 중보자가 구속의 중보자이시다.** 같은 분이 만물을 있게 하셨고, 같은 분이 타락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이마고 데이**, imago Dei)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그 형상의 원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히 이해된다. 잠언은 이 말씀을 "지혜"(**호크마**, חָכְמָה)로 부르며,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던 분으로 그린다(잠 8:22-31). 그리고 제7일의 닫히지 않는 안식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 선언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새 창조의 안식이 시작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열린다.

주님은 수고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 마태복음 11:28

제7일이 가리킨 안식, 히브리서가 약속한 안식, 그 안식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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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에게

창세기 1:1-2:3을 읽고 나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본문을 읽었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 본문 앞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 있다. **경외**다. 말씀 한마디로 존재를 불러내시는 절대적 주권 앞의 전율이다. **경탄**이다. 빛과 어둠, 바다와 뭍, 날개 달린 것과 기는 것 — 피조물의 정교함과 다양함 앞에서 마음이 열리는 경험이다. **기쁨**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반복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restaurat). 이 명제의 뿌리가 바로 창조론에 있다.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 선언하신 이 자연적 질서는 은혜의 적이 아니라 은혜의 무대다. 타락이 이 무대를 훼손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 무대는 회복되고 있으며, 종말에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떠서 빛을 본다면, 그것은 첫째 날의 메아리다. 숨을 쉬고 있다면, 그것은 생기를 불어넣으신 분의 은혜가 아직 거두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있게 하신 그 말씀이 — 바로 그 말씀이 —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창세기 1장은 끝이 아니라 서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실 그분, 새 창조를 여실 그분을 향한 장대한 서론. 그리고 그 서론의 마지막 장인 제7일의 안식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우리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