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타는 떨기나무 — 소멸되지 않는 불꽃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분 (출 3:1-15)

> 광야의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는 왜 얼굴을 가렸는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이 열어 주는 하나님의 자존성과, 그 이름을 자기 것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성경본문탐구, 구약, 출애굽기
- 게시일: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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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bible-study-exo3/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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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출애굽기 3:1-15 (개역개정)

>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
>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
>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때에
>
>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
>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
>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
>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
> **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
>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
>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
>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
>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
>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 도입 — 나무가 타는데 왜 사라지지 않는가

이 본문 앞에 선 모든 독자가 품을 핵심 질문은 하나다. **왜 이 불은 나무를 삼키지 않는가.** 피조 세계의 법칙은 단순하다. 불은 소비하고, 연료는 소진된다. 그러나 호렙 산의 이 떨기나무는 불꽃을 담고도 온전히 서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불꽃 가운데서 한 음성이 자신을 소개한다 —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이 두 장면, 즉 **소멸되지 않는 불꽃**과 **스스로 있는 이름**은 하나의 계시다. 이 본문은 그 계시가 무엇을 여는지 묻는 자리다.

## 역사적·문학적 맥락

모세는 애굽의 왕자였으나 광야로 도망하여 사십 년을 미디안 제사장의 사위로 살았다. 그에게 호렙은 "하나님의 산"이었으나, 일상적으로는 장인의 양 떼를 치던 생업의 경계였다. 그 평범한 노동의 자리에 하나님이 먼저 오셨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사백 년 가까이 침묵 속에 부르짖고 있었다. 본문의 동사 배열은 정교하다 — **보고**(라아), **듣고**(샤마), **알고**(야다), 그리고 **내려가서**(야라드). 침묵의 시간이 곧 부재의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네 개의 동사로 선언하신다.

떨기나무(세네)는 사막에서 자라는 보잘것없는 가시덤불이다. 백향목도 아니고 상수리나무도 아니다. 누구의 눈길도 끌지 않는 자리에서 불이 타오른다.

## 신학적 핵심 — 소멸되지 않는 불꽃과 자존하시는 분

### 1. 떨기나무의 불꽃 — 임재의 역설

>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불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불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담는다. 이 역설은 이후 성막과 성전, 마침내 성육신의 원형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에 임하시되 그 피조물을 파멸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칼뱅이 말한 "**하나님의 적응**"(**accommodatio Dei**)의 가장 첫 번째 형상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낮은 이해에 자신을 맞추시되, 자신의 영광을 덜어내지 않으신다.

### 2. 신발을 벗으라 — coram Deo

> **5**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신발을 벗는 것은 문화적 예의가 아니라 **피조됨의 고백**이다. 모세는 얼굴을 가렸으나 도망하지 않았다. 노예적 두려움은 달아나지만 자녀적 두려움은 엎드린다. 압도되면서도 떠나지 않는 것 — 이것이 거룩한 경외의 본질이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를 함께 아는 일이다.

### 3. 내가 내려가서 — 긍휼의 운동

> **7**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
>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본다·듣는다·안다, 그리고 **내려간다**. 신적 공감은 감정에서 멈추지 않고 언제나 구체적 하강과 구원 행동으로 이어진다. 사백 년의 침묵은 부재의 증거가 아니라, 하강을 준비하시는 분의 사랑의 시간이었다.

### 4.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 자존하시는 분

>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것은 존재론적 선언이다. 피조물은 모두 **차용된 존재**다. 우리는 '있는 자들'이 아니라 '있게 된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를 누구로부터도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존재 자체(*ipsum esse*)이시다. 히브리어 '에흐예'는 미완료형으로, "나는 있어 왔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자다"라는 시제의 초월을 품는다. 자존성(*aseitas*), 불변성, 영원성이 한 이름 안에 농축된다. 이 이름 앞에서 바로의 권세, 애굽의 신들, 사백 년의 세월은 모두 부차적 현상이 된다.

## 이 본문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가리키는가

떨기나무에서 말씀하신 "여호와의 사자"는 곧바로 여호와 자신으로 동일시된다(3:2과 3:4, 3:6). 피조 천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이중성 — 보내심을 받은 사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분 — 은 영원하신 성자의 선재적 현현(christophany)에 대한 개혁주의 전통의 오랜 독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복음서의 한 장면이 이 본문을 결정적으로 해석한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
> — 요한복음 8:58

유대인들이 즉시 돌을 들었다. 그들은 "내가 있느니라"(ἐγώ εἰμι)가 칠십인역 출애굽기 3:14 — *ἐγώ εἰμι ὁ ὤν*(나는 있는 자이다) — 의 직접 반향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단순히 자신의 선재를 주장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자신이 떨기나무 앞에 섰던 바로 그분**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요한은 이 선언을 마지막 책에서 완결한다.

>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
> — 요한계시록 1:8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 이 삼중 시제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의 신약적 번역이다. 모세 앞의 불꽃과, 나사렛 사람의 입술과, 보좌 위에 앉으신 어린양은 같은 한 분이시다. 그리고 요한복음 1:14는 호렙의 하강을 결정적 형태로 완성한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 — 요한복음 1:14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결국 육신이 되신 말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담고도 파멸되지 않으신 그분을 가리킨다.

## 오늘 우리에게

첫째, **우리의 일상이 떨기나무가 될 수 있다.** 모세는 양 떼를 치러 나갔을 뿐이다. 하나님은 평범한 노동의 자리를 거룩한 땅으로 바꾸신다. 특별한 장소를 찾아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오신 자리가 거룩한 땅이 된다.

둘째, **침묵을 부재로 읽지 말라.** 사백 년 가까이 하나님은 보고 계셨고, 듣고 계셨고, 아셨다. 지금 당신의 부르짖음도 동일한 네 개의 동사 아래 있다.

셋째, **존재의 중심이 옮겨져야 한다.** 나는 '있는 자'가 아니다. 나는 '있게 된 자'다. 이 고백이 참될 때, 스스로 있는 자 안에서만 내가 안전해진다. 얼굴을 가리되 도망하지 않는 자리 — 그 자리가 오늘 우리가 서야 할 거룩한 땅이다.

소멸되지 않는 불꽃은 여전히 타오른다.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름은 이제 한 사람의 입술로 우리에게 다시 말한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