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계명 — 율법인가 자유인가 (출 20:1–17)

> 열 말씀은 종을 묶는 쇠사슬이 아니라,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아버지가 자녀에게 건넨 자유의 헌장이다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성경본문탐구, 구약, 출애굽기
- 게시일: 2026-09-06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bible-study-exo20/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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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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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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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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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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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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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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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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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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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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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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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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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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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살인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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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간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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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도둑질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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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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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
> — 출애굽기 20:1–17

## 열 개의 "하지 말라" 앞에 선 독자

십계명을 읽는 사람은 대개 한 가지 질문을 품는다. **이것은 우리를 묶는 쇠사슬인가, 자유케 하는 길인가?**

현대인의 귀에 "하지 말라"는 말은 본능적으로 저항을 일으킨다. 자유는 경계선의 부재라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앙인조차 은근한 긴장을 품는다 —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이 열 개의 명령 앞에서는 종교가 다시 의무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 같다.

이 긴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격분한 이유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은혜로 시작한 자들이 행위로 완성하려는 본능 — 이것은 한국 교회의 율법주의적 경직성과 반율법주의적 방임 양쪽을 동시에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내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천둥소리 앞에서 열 말씀이 **왜**, **누구에게**, **어떤 순서로** 주어졌는지를 다시 들어야 한다.

## 서문이 모든 것을 바꾼다 — 역사적·문학적 맥락

출애굽기 20장을 읽을 때 가장 자주 건너뛰는 구절이 2절이다. 사람들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3절)부터가 십계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브리 전통은 2절을 **제1언**(첫째 말씀)으로 친다. 그리고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선언**이다.

>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
> — 출애굽기 20:2

이 한 문장이 뒤에 이어지는 모든 명령의 문법을 바꿔 버린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것을 지키면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순서가 정반대다. **구원이 먼저 있었고**, 율법은 그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삶의 모양으로 주어졌다. 이스라엘은 이미 홍해를 건넜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 뒤에야 시내산이 온 것이다.

고대 근동의 종주 언약(suzerain-vassal treaty) 양식을 연구한 학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힛타이트의 종주 언약 역시 서문에서 **왕이 종에게 베푼 은혜**를 먼저 나열한 뒤에 의무 조항을 제시한다. 그러나 고대 근동의 종주들은 **자기 힘으로 노예를 부리는 주인**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르다. 그분은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해방자로 자신을 소개하신다. 명령의 주권자이시기 전에, 구원의 은혜자이시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기독교는 사라진다. 명령이 먼저고 은혜가 보상이 되면, 그것은 이슬람이나 유교이거나 행위 종교의 한 변형이다. 은혜가 먼저고 명령이 응답이 될 때, 그것이 성경의 복음이다. 시내산은 복음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 시내산은 이미 **복음의 질서**로 구성되어 있다.

두 돌판의 구조도 이 은혜의 논리를 따라간다. 첫 돌판(1–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둘째 돌판(5–10계명)은 이웃과의 관계다. 예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신 그 이중 구조가(마 22:37–40) 이미 시내산에 있었다. 수직이 먼저고 수평이 그 아래로 흐른다.

## 율법의 세 가지 얼굴 — 신학적 핵심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뱅이 『기독교 강요』 2권 7장에서 체계화한 **율법의 세 가지 용도**(triplex usus legis)가 이 본문을 풀어 읽는 가장 정밀한 렌즈다.

**첫째, 정치적 용도**(usus politicus). 율법은 사회 안에서 악을 억제하는 고삐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원리는 신자가 아닌 사람의 양심에도 빛으로 작동한다. 세상이 지옥이 되지 않는 것은 이 일반은혜의 방벽 때문이다.

**둘째, 교육적 용도**(usus paedagogicus) 또는 몽학선생의 용도.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드러내 그리스도께로 몰아간다.

>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
> — 갈라디아서 3:24

십계명 앞에 서면 누구든 자기 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살인하지 않았다고 안심하는 사람에게 예수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마 5:22)라고 말씀하신다. 간음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라고 말씀하신다. 율법의 거울은 외면이 아니라 마음속까지 비춘다. 이 거울을 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들여다본 자만이 그리스도의 필요를 느낀다.

**셋째, 규범적 용도**(tertius usus legis). 이미 중생한 성도, 이미 성령을 모신 자녀에게도 율법은 여전히 살아 있는 삶의 규범이다. 이 세 번째 용도를 어떻게 보느냐가 루터파와 개혁주의를 가르는 결정적 지점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율법을 단지 회심 이전의 거울로만 보지 않는다. 자녀가 된 자에게 율법은 **아버지의 뜻**으로 새롭게 읽힌다.

>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
> — 시편 119:97

시편 기자가 율법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그는 죽은 문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사랑한 것이다. 율법을 사랑할 수 있게 된 자만이 자기 안에 성령이 일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반율법주의(antinomianism)가 은혜의 심화가 아니라 **은혜의 왜곡**인 이유다.

여기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가 명료해진다. 시내산 언약은 그 **외적 경륜**에서는 옛 언약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 **내적 본질**에서는 은혜 언약의 한 시행이다. 같은 열 말씀이지만,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 안에서 이 법은 더 이상 바깥의 돌판이 아니라 안의 마음판에 새겨진다.

>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
> — 예레미야 31:33

바깥에서 치는 채찍이 안에서 솟는 샘으로 바뀌는 것 —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 율법을 완성하신 이 — 이 본문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가리키는가

십계명을 읽을 때 우리가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질문이 있다. **누가 이 열 말씀을 완전히 지켜 냈는가?**

구약의 어떤 인물도, 어떤 왕도, 어떤 선지자도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없다. 다윗은 간음했고, 솔로몬은 우상을 섬겼고, 엘리야는 두려워 도망쳤다. 이스라엘 전체 역사가 시내산 언약의 파기로 점철된다. 그래서 율법의 두 번째 용도 — 거울 — 가 끝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정죄의 자리로 몰아간다.

그 정죄의 한가운데에 그리스도가 오신다. 그분이 행하신 일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 그리스도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온전히 이루셨다. 단 하나의 계명도 어기지 않으셨고, 단 한 순간도 마음으로 계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그분은 스스로를 가리켜 이렇게 선언하셨다.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
> — 마태복음 5:17

그분은 첫 돌판도, 둘째 돌판도 완전히 이루셨다. 오직 아버지만을 사랑하셨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 아니, 자기 몸보다 더 — 사랑하셨다.

둘째,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 그리스도는 율법이 정죄한 저주를 친히 담당하셨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 — 갈라디아서 3:13

시내산의 천둥과 번개 앞에서 백성이 떨었던 것은(출 19:16–18) 이 율법을 범한 자가 받을 심판의 그림자였다. 그 심판이 골고다에서 집행되었다 — 단, 범법자들 위가 아니라 의로우신 분 위에. 그러므로 신자가 누리는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자유**이며, 동시에 **율법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다.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 — 로마서 8:1

시내산과 시온산의 대조가 히브리서에 장엄하게 나온다. 옛 언약의 백성은 만질 수 없는 산, 불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 앞에 섰다(히 12:18–21). 새 언약의 백성은 시온산, 하늘의 예루살렘,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나아간다(히 12:22–24). 같은 하나님이시고 같은 거룩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 거룩을 만나는 자리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그리스도와 무관한 옛 종교의 유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히 성취되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 오늘 우리에게 — 열 말씀을 다시 읽는 법

이 본문이 21세기 한국 교회의 성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첫째, **은혜의 순서를 지켜 읽으라**. 십계명을 펼 때마다 2절의 서문을 먼저 낭독하라.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선언 없이 3절로 달려가면, 우리의 신앙은 즉시 율법주의로 기울어진다. 기도회마다 자기 의지를 다짐하며 "이번엔 꼭 지키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신앙은 시내산 이전에 홍해가 있었음을 잊은 신앙이다. 우리의 순종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구원의 **자격**이 아니라 **증거**다.

둘째, **거울을 피하지 말라**. 율법의 두 번째 용도는 중생 이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중생한 자에게도 이 거울은 계속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여전히 남은 부패가 있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 앞에서 내 혀의 독설을 식별하고, "간음하지 말라" 앞에서 내 눈의 방황을 인정하며, "탐내지 말라" 앞에서 내 마음의 비교의식을 고백하는 것 — 이것이 평생 계속되는 성도의 싸움이다. 거울 앞에 서지 않는 자는 자기 죄를 구체적으로 식별할 수 없고, 구체적으로 식별되지 않는 죄는 구체적으로 회개되지 않는다.

셋째, **계명을 사랑의 문법으로 다시 읽으라**. 6절의 한 구절이 전체 해석의 열쇠다.

>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
> — 출애굽기 20:6

계명 준수는 사랑의 대체가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께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사랑이 먼저다. 계명은 사랑이 흐르는 물길이다. 안식일(8–11절)은 단순한 노동 규제가 아니라 시간의 성례 — 일손을 놓는 그 순간 "내 의가 아니라 그분의 의로 살아간다"는 고백을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부모 공경(12절)은 단순한 효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가장 작은 교회를 지키는 일이다. 살인·간음·도둑질·거짓 증거·탐심 금지는 단지 "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웃의 **생명·결혼·소유·명예·마음**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명령의 뒷면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각 계명을 "금지되는 것"과 "요구되는 것"의 양면으로 해설한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회심의 한 표지는 십계명이 갑자기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이다. 예전에는 짐이었던 것이, 이제는 아버지의 품으로 이끄는 길로 보인다. 율법이 짐이면 우리는 아직 종이다. 율법이 기쁨이면 우리는 이미 자녀다.

십계명은 종에게 주어진 쇠사슬이 아니다.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아버지가 이제 막 자녀가 된 자에게 건넨 **자유의 헌장**이다. 서문 없이 본문을 읽으면 모든 것이 오해된다. 서문과 함께 읽으면 열 말씀은 질문의 답이 된다 — 율법인가 자유인가. 둘 다다. 그리스도 안에서, 둘은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