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 해석은 누가 하는가 — 사사로운 해석 vs 교회 전통

> Sola Scriptura는 Solo Scriptura가 아니다. 개인 QT 절대주의와 교황권 사이, 개혁주의가 제시한 제3의 길.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신학, 성경해석학, Sola Scriptura, WCF, 신앙고백
- 게시일: 2026-09-01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bible-hermeneutics-authority/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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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성경, 다른 결론

한 성도는 QT 중에 "성령께서 새롭게 보여 주셨다"고 말한다. 다른 성도는 어느 강사에게서 "이 비유의 감추어진 열쇠"를 얻었다고 말한다. 같은 책을 펼쳤는데 결론이 다르다. **성경 해석은 누가 하는가?**

교회는 두 절벽 사이에 서 왔다. 한쪽은 교황청이다. 교회가 성경의 어머니이므로 해석의 최종 권위가 교도권에 있다는 주장이다. 다른 쪽은 "나 혼자 성령"이다. 2천 년 교회의 읽기를 건너뛰고 개인의 감상을 성경의 의미와 동일시한다. 개혁주의는 이 두 절벽을 모두 거절한다.

## 벧후 1:20-21의 무게

>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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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
> — 베드로후서 1:20-21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의 원어는 *idias epilyseos*다. 개인 성경 독서를 금지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공적 사역과 사사로운 자의**(**自意**)를 구별하라는 명령이다. 성령이 감동하여 기록하게 하신 책은 같은 성령의 공적 인도 아래에서만 참으로 열린다.

## Sola Scriptura ≠ Solo Scriptura

종교개혁의 기치 **Sola Scriptura**는 "오직 성경"이다. 그러나 이를 **Solo Scriptura**(나 혼자 성경)와 혼동하면 개혁주의는 열광주의로 추락한다. 전자는 성경만이 최종 권위이나 그 성경을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조명 아래, 2천 년 신앙고백과 대화하며 읽는다. 후자는 개인과 성경 사이에 아무것도 두지 않는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1권 7장에서 "**교회는 성경의 종이지 주인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증언**할 뿐이다. 그러나 같은 칼뱅이 1권 9장에서 반대편을 경고한다. "성령과 말씀을 분리하는 자는 사탄의 술책에 문을 연다." 뮌처 같은 열광주의자가 문법을 무시하며 "성령이 내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했을 때, 칼뱅은 그것이 이단의 입구임을 보았다.

## 명료성은 무제한이 아니다

성경의 명료성 곧 *perspicuitas Scripturae*는 **구원에 필요한 것**에 관해 성경이 충분히 명료하다는 뜻이지, 모든 본문이 모든 독자에게 즉시 이해된다는 주장이 아니다. 베드로 자신이 증언한다. 성경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로마는 교회를 성경의 *mater*(어머니)로 본다. 개혁주의는 교회를 **성경의 딸**(*filia ecclesia*)로 본다. 정경 확정은 권위 부여가 아니라 성령이 이미 부여하신 권위의 인정이다. 그러나 그 딸은 고아가 아니라 **2천 년 성령의 인도 아래 성경을 읽어 온 공동체**다.

## norma normans와 norma normata

개혁주의 해석학의 결정적 구분이 여기 있다. ***norma normans***(규범 위의 규범)는 오직 성경이다.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 규범이다. ***norma normata***(규범이 된 규범)는 사도신경·니케아·웨스트민스터 같은 신앙고백이다. 성경에 의해 만들어진, 교회가 성경을 향해 나아갈 때 따르는 이정표다. 신조는 성경 위에 있지 않으나 허공에 뜬 개인의 감상 위에는 있다. 이단과의 씨름 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집단적으로 증언된 열매이기 때문이다.

## 조명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다

오웬이 퀘이커의 "속빛"을 논박하며 남긴 명제가 있다. **성령의 조명은 새 진리를 주지 않는다.** 이미 기록된 것의 의미를 밝혀 주실 뿐이다. 성령은 자신이 기록하신 책을 폐기하지 않으신다. 문법·문맥을 짓밟으며 "성령이 내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는 해석은 성령의 이름을 빌린 자의다. 청교도는 **기도하는 학자들**이었다. 해석자의 경건도 해석의 요건이다.

>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
> — 요한복음 7:17

## WCF 1장 — 해석학의 닻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두 문장으로 쐐기를 박았다. **9항**은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신이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고 선언한다. 불분명한 본문은 더 분명한 본문으로 읽는다. **10항**은 "모든 종교 논쟁의 최고 재판관…은 오직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다"라고 못 박는다. 최고 재판관은 "성령"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다. 성경과 분리된 성령은 재판관이 아니다. 이것이 개혁주의가 교황청과 열광주의를 동시에 거절하는 자리다.

## 한국 교회의 세 빈틈

이 닻이 뽑히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한국 교회 현장에서 세 가지가 보인다. 첫째, **개인 QT 절대주의** — "QT 중에 성령께서 이 뜻을 보여 주셨어요"가 설교와 신조 위에 올라앉는다. 둘째, **은사주의적 주관주의** — 개인의 심리 상태를 성령의 음성과 동일시한다. 셋째, 이 빈틈에 이단이 파고든다. **성경 독점 해석을 주장하는 신흥 종파**가 노리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먼저 "누구나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개인주의를 허용한 뒤, "이 비유는 특정 열쇠로만 풀린다"며 해석 독점자로 등장한다. 개인 해석의 방종이 허용된 자리에는 반드시 해석 독점을 파는 자가 들어온다.

## 베뢰아인처럼

대안은 교황청이 아니라 베뢰아인이다.

>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
> — 사도행전 17:11

바울의 가르침을 자기 감상이 아니라 **성경으로**,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검증했다.

개인 QT는 귀한 출발점이지만 종착점이 아니다. 성령은 내 골방의 감동만이 아니라 교회 역사와 신조와 주일 강단과 공동 분별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내 해석을 공교회의 해석 위에 두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심령을 성령과 혼동한다. 그 혼동이 이단의 문을 여는 열쇠다.

오늘도 성경을 펼친다. 혼자가 아니라 2천 년 성도들과 함께 한 장씩 읽는다. 이것이 **Sola Scriptura**이지 **Solo Scriptura**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