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의 어려운 본문 — 불편함과 함께 읽는 법

> 가나안 진멸·여종 매매·저주시·여인의 침묵 — 불편한 본문 앞에서 신자는 검열도 정당화도 아닌 **함께 읽기**를 배워야 한다.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성경론, 해석학, 성경무오, 변증
- 게시일: 2026-06-11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bible-difficult-passages/
- 컬렉션: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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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청년이 큐티 중 멈춘 자리

새벽 다섯 시. 한 대학생이 시편 137편을 읽다가 마지막 절에서 손이 멈췄다.

>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
> — 시편 137:9

그는 책장을 덮지 못했다. 무신론자 친구가 던진 말이 떠올랐다. "**너희 신은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노래하게 한 신이잖아.**" 그날 이후 그는 큐티를 멈췄다. 교회에서는 누구도 시편 137편을 설교한 적이 없었다. 어디 가서 이 질문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청년의 멈춤은 한국 교회의 거대한 사각지대를 가리킨다. 가나안 진멸, 출애굽기의 여종 규례, 시편의 저주시, 디모데전서의 여인의 침묵 — 우리는 이 본문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강단은 침묵하고, 큐티 책자는 다른 본문으로 건너뛰며, 청년부 모임에서는 누가 물으면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 한국 교회의 두 거짓 처방

불편한 본문 앞에서 한국 교회가 무의식적으로 채택해 온 처방은 둘이다.

첫째는 **검열**이다. 강단에서, 큐티에서, 교재에서 어려운 본문을 **조용히 잘라낸다.** 마치 그 본문이 성경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 처방의 결과는 무엇인가? 신자가 어느 날 무신론 유튜브에서, 회의주의 책에서, 이단의 입에서 그 본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때 그 본문은 **공격 무기**가 되어 돌아온다.

둘째는 **단순 정당화**다. "하나님이 옳으시니 그냥 받아들이세요." 이 처방은 본문을 옹호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신자의 양심을 **마비시킨다.** 본문 앞에서 정직하게 멈춰선 사람에게 "멈추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은, 신앙을 **둔감**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두 처방은 정반대로 보이지만 같은 일을 한다. **본문을 함께 읽지 못하게 만든다.** 검열은 본문을 숨기고, 정당화는 본문을 닫는다. 이 글은 세 번째 길을 모색한다 — **불편함과 함께 읽는 법.**

## 읽기 자세 다섯 원칙

### ① 불편함을 인정하라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경이 아니다. 성경 자체가 그 본보기를 보인다. 시편 137편은 검열되지 않은 한탄이다. 시편 88편은 위로 없이 어둠으로 끝난다. 욥기는 욥의 항의를 **지우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가장 어두운 감정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당신이 시편 137:9 앞에서 멈췄다는 것은 신앙의 약점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성령이 일하시는 자리다.

### ② 장르를 분별하라

어려움의 절반은 장르 혼동에서 온다. 성경에는 적어도 다섯 장르가 섞여 있다.

| 장르 | 기능 |
|------|------|
| 시(詩) | 감정의 토로 — 처방이 아니라 **고백** |
| 역사(史) | 사건의 서술 — **서술이 곧 승인은 아니다** |
| 율법(律) | 처방 — 시대적 그릇 안의 영원한 원리 |
| 예언(豫) | 종종 상징·과장 — 문자적 일대일이 아님 |
| 서신(書) | 논증 — 즉각적 컨텍스트가 결정적 |

시편 137:9는 **시**다. 처방이 아니라 한탄이다. 사사기의 잔혹한 사건들은 **역사**다. 서술은 승인이 아니다 — 사사기 21:25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로 끝나는 이유다. 장르를 혼동하면 본문은 금세 괴물이 된다.

### ③ 문맥(즉각·전체)을 읽으라

가나안 진멸 명령은 진공 속에 떠 있지 않다. 그 본문 위에는 적어도 두 개의 빛이 비춘다.

>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
> — 창세기 15:16

> **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 **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
> — 레위기 18:24-25, 28

가나안 진멸은 **인종 청소**가 아니다. 그것은 400년의 회개 유예 끝에 내려진 **심판**이며, 같은 죄를 범하면 이스라엘 자신도 동일하게 토해진다는 **동일 기준의 심판**이다. 게다가 라합과 기브온의 사례는 **탈출구가 열려 있었음**을 보여준다. 본문 하나를 잘라내면 잔혹한 명령이 되고, 전체 안에 두면 우주의 의가 보인다.

### ④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으라

>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 — 누가복음 24:27

가나안 진멸은 어디서 끝나는가? 골고다에서 끝난다. 헤렘(חרם, 진멸·바침)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대신 서신 사건**이 십자가다.

> **46**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 — 마태복음 27:46

>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
> — 갈라디아서 3:13

구약의 헤렘은 **그림자**였다. 실체는 그리스도가 **우주의 헤렘 자리에 친히 들어가신 사건**이다. 가나안 진멸을 그리스도 없이 읽으면 잔혹사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읽으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들어가신 **그 자리의 무게**가 보인다.

### ⑤ 겸손의 자리에 머물라

> **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
> — 신명기 29:29

모든 것이 명료해야 신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본문은 끝까지 **덮인 채로** 남는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피조물의 자리**를 인정한다. 이는 사고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다. 욥은 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답을 가지신 분**을 만났다.

## 네 가지 표본 케이스

**가나안 진멸** — 위에서 본 대로, 창 15:16 + 레 18 + 라합·기브온의 탈출구 + 갈 3:13의 그리스도 헤렘. 이 다섯이 모이면 본문은 닫히지 않는다.

**출 21:7-11 여종 규례** — 고대 근동 법전(함무라비)과 비교하면 출애굽기는 그 시대의 노예제를 **처방**한 것이 아니라 **제한**한 것이다. 약자 보호의 활시위가 **당겨지고 있었다.** 종착점은 갈라디아서 3:28("종이나 자유인이나 ...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이다. 본문을 정지된 한 점으로 읽지 말고 **어디로 향하는 활시위**로 읽어야 한다.

**시편 저주시** — 시편 109편, 137편은 **검열되지 않은 정직**이다. 그것은 살인적 분노를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채권자 자리를 **하나님께 양도**하는 자리로 인도된다 — 로마서 12:19,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저주시는 처방이 아니라 **분노의 성화 과정**이다.

**딤전 2:12 여인의 가르침** — 에베소 컨텍스트(1세기 아데미 신전 도시, 거짓 교사 침투)를 떠나면 본문이 절대화된다. 동일한 바울이 갈 3:28을 썼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여인들을 세우신 분이 그리스도다. 이 본문도 **시대의 그릇 안에서** 읽어야 한다.

## 불편함의 신학

불편함은 두 얼굴을 가진다.

하나는 **내 도덕 감각의 절대화**에서 오는 불편함이다. 로마서 1:21-22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우리의 도덕 직감은 일반은혜의 산물인 동시에 죄로 굴절되어 있다. 내 직감이 본문을 거부한다는 사실이 **본문이 틀렸다**는 자동 결론을 주지는 않는다.

다른 하나는 **성령이 일하시는 자리**로서의 불편함이다. 성령은 종종 우리의 자기 의를 해체하시기 위해 본문 앞에 **우리를 멈추신다.** 그 멈춤은 회개와 그리스도 의지의 출발점이다.

두 불편함을 분별하는 시금석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7:17이다.

>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
> — 요한복음 7:17

알기 위해 **행하려는 의지**가 먼저다. 불편함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 옳은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알고자 하는 자세에 있는가?"이다.

## 본문이 나를 심문하는 자리

성경 앞에서 우리는 **판사석**에 앉지 않는다. 우리는 **피고석**에 선다. 본문이 거짓말한 적은 없다. 본문이 나를 **심문하는 자리**에 머무는 것 — 그것이 신앙이다.

한국 강단을 향한 호소: 어려운 본문을 잘라내는 강단은 신자의 의심을 **외부의 손**에 넘긴다. 강단은 본문을 **함께 읽어주는 자리**여야 한다. 검열도 정당화도 아닌, **함께 머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 다시, 새벽 다섯 시

처음의 청년에게 돌아가자. 그는 시편 137:9를 다시 읽는다.

답을 받지 못한다. 어쩌면 평생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 **본문이 그를 떠나지 않는다.** 그가 멈춰 선 그 자리에서, 본문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붙드심이 — 어쩌면 — 성령이 일하시는 첫 신호다.

본문 앞에 머물라. 불편함을 죽이지 말라. 함께 읽는 법을 배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