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경과 정경 사이 5부: 바룩서의 기도는 왜 다니엘이 될 수 없었는가

> 바룩서 1장의 회개 기도는 다니엘 9장과 놀랍도록 닮았다. 그러나 두 기도 사이에는 '경건한 모방'과 '예언적 영감'의 차이가 있다.

- 분류(category): 미분류
- 태그: 성경론, 외경, 정경, 바룩서, 다니엘
- 게시일: 2026-08-24
- 수정일: —
- 원문(HTML): https://truth.ai.kr/blog/apocrypha-canon-5/
- 컬렉션: blog

---

## 두 기도를 나란히 놓으면

유대인 회당에서 두 개의 회개 기도가 낭독된다고 상상해 보자. 하나는 다니엘 9장이다.

> **4**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
> **5**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
> **6**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과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
> — 다니엘 9:4-6

다른 하나는 바룩서 1장 끝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단락이다. "**주여 공의는 주께 속하였고 수욕은 오늘과 같이 우리 얼굴에 속하였나이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우리가 주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주의 종 선지자들을 듣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바룩 1:15-21, 공동번역 기반 축약).

두 본문은 표현의 리듬, 단어의 순서, 죄를 인정하는 문법까지 거의 동일하다. 학자들은 한쪽이 다른 쪽을 의식적으로 따라 썼다는 것에 큰 이견이 없다. 다수 견해는 **바룩서가 다니엘 9장(그리고 느헤미야 9장)을 모델로 삼아 2차 성전기 어느 시점에 작성되었다**는 쪽이다. 책은 예레미야의 서기 바룩을 저자로 내세우지만, 본문 내부의 연대 모순 — 포로가 된 지 5년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설정(바룩 1:2, 10) — 이 이를 문학적 장치로 드러낸다.

이 시점에서 개신교 독자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형식이 이토록 같은데, 왜 하나는 정경이고 하나는 외경인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으면 정경론은 공허한 교단주의가 된다.

---

## 닮았으되 네 지점에서 갈라진다

두 기도를 나란히 놓고 문단 단위로 겹쳐 읽으면, 겉모습은 같되 **네 지점**에서 결이 갈라진다.

### 첫째, 기도의 궁극 목표

다니엘 9장은 모든 간구를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린다.

> **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
>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
>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
> — 다니엘 9:17-19

"**주 자신을 위하여**" (למענך, 레마아느카) — 이 못질로 기도가 닫힌다. 이스라엘의 회복조차 수단이다.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바룩서의 기도도 하나님을 부르지만, 간구의 축이 다르게 기운다. "**열방 가운데서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바룩 2:14 이하)라는 표현이 본문의 중력 중심이 된다. 회복된 이스라엘이 찬송하는 그림이 목적 자리에 올라온다. 나쁜 기도는 아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철저한 하나님 중심성**에서 한 단계 내려앉는다.

### 둘째, 간구의 근거 — 오직 긍휼인가, 조상의 의가 스며드는가

다니엘 9:18은 회개의 문을 자기 의에 대해 완전히 닫는다.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바룩서도 비슷한 문장을 시도한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의를 의지하여 간구하지 아니하오며**"(바룩 2:19). 그러나 곧이어 책은 이렇게 말한다.

> 우리에게서 당신의 긍휼을 거두지 마옵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
> — 바룩 2:34-35 (공동번역 기반)

더 결정적으로, 바룩 3:4은 죽은 자의 기도를 언급한다. "**이스라엘의 죽은 자들의 기도와 그들의 의인들의 아들들의 기도를 들으소서.**" 히브리 정경의 회개 기도 어디에도 없는 어법이다. 느헤미야 9장, 에스라 9장, 다니엘 9장, 시편 106편 — 모든 정경의 회개 기도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긍휼**로 문을 닫는다. 죽은 조상의 의라는 매개가 끼어드는 순간, 수직선이 굽는다. 이 결이 후대 중세의 의인의 공로 저장소(thesaurus meritorum) 신학으로 자라나는 씨앗이 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 셋째, 예언적 성취 — 칠십 이레가 있는가

다니엘 9장의 기도는 경건한 독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니엘이 기도하는 동안 가브리엘이 날아와 응답을 준다.

>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
> — 다니엘 9:24

회개 기도가 **메시아 예언의 시간표**로 직결된다. 기도의 진짜 응답은 예루살렘의 즉각적 재건이 아니라, 수백 년 뒤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끊어짐으로 죄를 끝내시는 사건이다. 다니엘 9장은 이렇게 십자가를 향한 화살이 된다.

바룩서의 기도는 이 귀결점을 갖지 못한다. 책은 회개 기도(1:15-3:8) 뒤에 지혜 찬가(3:9-4:4)를 붙이는데, 이 찬가는 지혜를 이스라엘의 토라와 동일시하며 닫는다. "**그 책은 하나님의 계명이요 영원히 머무는 율법이니"**(바룩 4:1). 아름다운 문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혜는 이스라엘 율법에 갇힌다 —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로 성취되는 성육신적 지혜론으로 열리지 않는다.

### 넷째, 신약의 인용 흔적

신약은 구약을 560회 이상 인용한다. 다니엘서는 예수와 사도들에게 빈번히 인용된다 — 특히 "**인자"**라는 호칭 자체가 다니엘 7장에서 왔고, 예수께서 산상 설교에서 성전에 임한 "**멸망의 가증한 것**"(마 24:15)을 가리키시며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라고 하셨을 때, 그 본문이 다니엘 9:27이다. 회개 기도에 이어진 70이레의 예언은 신약의 핏줄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바룩서는 신약 어디에서도 "**성경에 이르되**"(γέγραπται)의 공식 아래 인용되지 않는다. 고대 교부들 사이에 바룩서를 예레미야의 부록처럼 취급한 경우가 있었고, 라틴 전통이 이를 넓게 수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와 사도들이 사용한 **성경 목록의 경계**에 이 책은 들어 있지 않다.

---

## 경건한 모방과 영감된 기도의 차이

이 네 지점을 모으면 바룩서 기도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경건한 모방**이다. 2차 성전기 유대 공동체는 다니엘 9장을 사랑했고, 읽고 또 읽었고, 그 리듬을 흡수했으며, 자기 시대의 절망 속에서 비슷한 기도를 써 올렸다. 이것은 아름다운 영적 활동이다. 오늘 우리도 시편을 모방한 기도를 쓰고,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을 따라 외운다. 이런 작업은 공동체의 신앙을 빚는다.

그러나 **모방과 영감은 다르다**. 형식의 일치는 영감의 동등을 뜻하지 않는다. 시편의 형식을 흉내 낸 시는 고대 근동에 많았고 지금도 많다. 그러나 영감된 시편은 150편이다. 이 경계는 책의 외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령께서 어느 기록 위에 당신의 숨결을 두셨는가**에 의해 그어진다.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에서 정경의 자기-증거(αὐτόπιστον, autopistia)를 말했다. 정경은 외부 인증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께서 그 책 안에서 신자의 마음에 증거하신다. 이 내적 증거는 감정의 끌림이 아니라, 책이 **그리스도로 수렴하는가**의 유기적 테스트다. 다니엘 9장은 십자가를 향해 화살처럼 날아간다. 바룩서의 기도는 아름답지만 그 화살의 궤적을 갖지 못한다.

칼뱅도 「기독교 강요」 1권 7-8장에서 같은 말을 한다. 정경은 교회의 결정으로 권위를 얻은 것이 아니라, 성령이 저자 안에서 일하시고 독자 안에서 증언하시는 **두 끝의 동일한 사역**으로 권위를 드러낸다. 바룩서에는 이 두 끝이 모이지 않는다.

---

## 왜 이 구분이 오늘도 중요한가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바룩서의 기도가 그렇게 경건하다면, 그냥 읽고 기도에 활용하면 되지 않나. 그렇다. 루터가 외경을 "**성경과 동등하지 않지만 읽기에 유익한 책들**"로 자리매김한 이유가 여기 있다. 버리라가 아니라 **구분하라**가 종교개혁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구분은 사소한 행정 문제가 아니다. 책이 **신앙과 삶의 규범**(regula fidei et vitae)으로 기능할 때, 그 책의 결은 교회의 기도 속으로 스며든다. 죽은 조상의 의에 호소하는 기도의 문법이 규범이 되면, 성도의 기도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중보**에서 **전승된 성인들의 공로**로 중심축이 조금씩 이동한다. 이 이동이 1,500년에 걸쳐 이루어지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긍휼 앞에 서는 자세가 달라진다. 종교개혁은 이 축을 다시 다니엘 9:18 —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 로 되돌린 운동이었다.

---

## 같은 말로 기도하되 다른 문을 연다

오늘 우리가 다니엘 9장의 기도로 기도할 때, 우리는 단지 좋은 문장을 빌려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기도가 이미 십자가에서 응답되었음을 알고 기도한다.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예고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단 9:26)는 갈보리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로 성취되었다. 이 응답의 소리가 들리는 기도와, 그 소리 없이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기도 — 두 기도는 겉이 같아도 문이 다르다.

시리즈를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는 이제 한 가지를 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계선 — 예수와 사도들이 사용했다는 그 히브리 정경의 목록 — 은 **실제로 어떻게 형성되고 확정되었는가**. 우리는 1부에서 5부까지 외경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정경의 바깥쪽, 그 경계가 그어진 **역사의 실제 순서**로 들어갈 차례다.